[선비의 고장 영주] 서원 탐방

연 혁
영주의 첫 서원으로 1558년(명종 13)에 군수 안상이 창건하였으며, 1572년(선조 5) 사당을 세워, 이황의 위패를 봉안, 1574년(선조 7)에 사액(도산서원과 같은 해임)을 받았다.

예로부터 영주는 문예를 숭상하는 기운이 높았던 곳으로, 이곳 이산리에는 선비양성을 위한 기금이 약간 마련되어 있었으나 관사(館舍)가 없어서 선비들이 모일 장소가 없었다.

마침, 새로 부임한 안군수가 인재양성, 교학부흥에 뜻이 있어, 선비들의 뜻을 수렴하여 학사(學舍)를 건립하니, 이때 경비나 노역을 일체 민간에게 부담시키지 않아, 안군수는 마을 주민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다.

이산서원이라는 이름은 이 마을의 지명인 이산리에서 따왔으며, 경지당, 성정재, 진수재, 지도문 등이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경지당만 남아 있다.

이산서원은 독서법 등을 규정한 원규를 만들어 당시의 서원 운영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퇴계가 1559년 찬한 이산서원원규는 서원 운영의 정형화를 제시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광해군 6년(1614년)에 현위치(이산면 내림리)로 이건하였으며 고종 8년(1871년)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철폐 되었다가 1936년 경지당만 복원되었다. 
 
배향인물
이황(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진보(眞寶). 호는 퇴계(退溪).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에서 좌찬성 식(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으나,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12세에 작은아버지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잠(陶潛)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20세를 전후하여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부터 다병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한다.

27세(1527)에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37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 간 복상했고, 39세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해 봉임 전에 청해서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중 주자가 백록동서원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서적·학전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조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이다.

1년 후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을 지어 다시금 구도(求道) 생활하다가 52세(1552)에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56세에 홍문관부제학, 58세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노흥업 실버기자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