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향인 인터뷰] 전홍구 KBS 부사장

지난 3월 우리고장 출신 출향인 전홍구(57)씨가 KBS 신임 부사장(경영담당)으로 취임했다.

전 부사장은 문수면 권선리 고랑골(난곡)에서 태어난 후 바로 시내 성누가병원 인근 오거리로 이사해 어린시절을 보냈다.

전 부사장은 어린시절을 보낸 고향 영주에 대해 “나의 가치관이나 품성을 길러주고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준 곳, 그리고 소중한 추억을 준 항상 어머니 같은 푸근함을 주는 마음의 고향”이라고 했다.

현재 영주에는 작고한 형 전홍대씨를 대신해 장수농공단지에서 제조업을 하는 조카딸 전세라(대림물산,대림포장 대표)씨와 누나(장인석 대흥물산 대표의 모친)가 살고 있다.

본지는 전 부사장을 만나 최근 근황과 고향 영주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부사장 취임 후 바쁜 것으로 알고 있다. 근황은? = 지난 3월 15일자 취임하자마자 전산망 마비, 봄 프로그램 정기 개편, 조직개편과 후속 작업 등으로 제대로 업무파악을 할 겨를도 없이 4개월이 다 되어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KBS의 오랜 숙원이자 당면과제인 수신료현실화를 이루기 위한 시동을 걸었는데 일상적이기는 하나 방대한 조직의 살림살이 챙기는 것과 큰 사안에 적기에 대응하는 일, 조직의 생존을 위한 변화를 이끌어 내는 일 등등 이래 저래 너무 바쁘답니다. 운동부족에다 잠잘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바쁜 일상입니다

▲어린 시절 영주에서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본인에게 영주는 어떤 의미인가? = 영주는 나의 가치관이나 품성을 길러준,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고 조상들의 뼈가 묻힌 곳입니다. 어린시절의 소중한 추억을 준 항상 어머니 같은 푸근함을 주는 마음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KBS에 입사하게 된 계기는? =대학졸업 후 군복무를 마친 1981년 가을 취직시험 때문에 여의도에 들렀는데 당시 KBS에 당시 원서를 내는 줄을 보고서 나도 줄을 서게 되었습니다. 당시 형의 권유로 기자로 응시코자 하다가 시험내용에 실기가 있어서 실기가 뭔지 몰라 기획행정직으로 응시하였습니다(실기시험은 카메라 앞에서 원고를 읽는 것인데 그걸 미리 알았으면 기자로 응시했을 것이며, 그럴 경우는 지금의 나와는 다른 인생이겠지요).

당시 다른 사기업에도 합격하였는데 가장 먼저 발령 난 곳이 KBS였고 월급 많이 준다는 사기업에서 계속 입사 독촉이 왔지만 직장으로서 KBS는 공익에 기여하는 등 나름의 가치와 보람도 있다고 여겨져서 그냥 눌러 앉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중책을 맡았다. 국가기간 방송이자 공영방송인 KBS를 어떤 방송으로 만들 계획인가? = 국민들이 방송의 청정지대인 KBS에 거는 기대가 매우 클 것으로 생각합니다.

시청자가 내는 소중한 수신료로 운영되는 KBS는 공영방송으로서 유익하고 좋은 프로그램으로 국민의 삶을 살찌우게 하는 등 공적인 책무와 기능을 다하는 게 중요하지요. 또한 KBS는 겨울연가나 뮤직뱅크 등으로 전세계에 한류를 주도해 왔는데, 앞으로도 더 질 높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려 대한민국의 국격을 올리는데도 일조하고 싶습니다.

▲어린시절 고향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다면?=투박하고 촌스럽기까지 한 고향의 사투리와 특유의 억양으로 인해 고등학교를 서울로 진학한 후 친구들이 좀 따라하기도 하고 많이 웃기도 했답니다

▲평소 고향소식은 어떻게 접하고 있나? 고향과 관련해 사회 활동을 하는 것이 있다면? = 고향소식은 주로 영주시민신문을 통해 접합니다. 지역사회의 신문이 고향의 향수를 달래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고향과 관련해 사회 활동을 하는 것은 특별히 없지만 몇 년전 영주남부초등학교 총동창회장을 맡게 되면서 많은 좋은 고향 선후배들을 만나는 계기도 되었고 고향 영주에 대해서 애향심도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여가시간 활용 방법과 취미생활은? =여가시간이 있으면, 체력관리를 위해 등산을 하거나 골프를 한답니다. 여행을 좋아하고 보이차나 홍차 등 차를 즐기고 차 동호인들과의 만남도 좋아합니다.

▲좌우명 혹은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성실하게 매사에 최선을 다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정직하게 살고 신의를 지키는 것이며 여건이 되면 남들에게 베플며 살고 싶습니다.

중학시절 당시 박병철 교장선생님(고 박정희대통령의 은사였다는 기억도 있음)께서 서예시간에 과제로 준 “남을 이해하고 돕는 정신” 이란 문구가 감명적이어서 오늘날 까지 새기고 있습니다. 1961년 영주의 큰 수해 후 초등시절 몇 년간 가난을 겪으면서 상대편의 어려움이나 입장을 잘 헤아리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공동체 생활이건, 조직생활이건 간에 상대방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는 세상사를 잘 풀어가는 지혜라는 생각입니다.

▲고향 영주를 생각하면서 안타까운 점이나 조언해 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 지난해 가을 단풍이 한창이던 10월말경 직장동료 12명이 소수서원, 부석사, 소백산 자락길 등을 관광하고 사과도 사고, 소고기도 실컷 먹었는데 모두들 탄복하였답니다. 다만, 당일 일정으로는 좀 빡빡해서 적절한 숙박시설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인데 중단된 판타시온 리조트 공사가 하루 빨리 재개되어 영주의 품격에 걸 맞는 문화관광도시가 되길 기대합니다. 갈수록 문화와 레져에 대한 욕구도 증가할 것으로 판단되는데 우리 고향만한 곳도 드물다는 생각입니다.

▲고향 영주에서 친했던 친구가 있다면?= 중학교부터 입시가 있던 시절이라 친구들이 대체로 공부만 하던 모범생이고 그래서인지 소개할 만한 사연이 기억이 안나는 군요. 다만 중학2년때 같은 학년의 힘좀 쓰는 친구들 따라다니며 농땡이 짓(?) 하던 성밑에 살던 김ㅇㅇ이란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와 짤짤이(?) 하면서 친해졌고, 그 친구집에 가면 그 부모님께서 내게 참 잘해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짤짤이는 당시 10원짜리 동전으로 했고 우린 당시 그걸 삼치기라 했는데 난 그걸 참 잘해서 엄하신 아버지 눈을 피해 노는데 좀 빠져서 학교성적도 많이 내려갔던 기억이 납니다.

중학2년을 중퇴 후 대구의 모 고등학교를 다니던 그 친구를 영주역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제가 입은 교복을 보고 저에게 어떻게 그 고등학교 들어갔냐며 의아해 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친구는 저를 자기와 똑같이 농땡이로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친구는 외동아들로서 착하신 부모님 속 깨나 섞인 것으로 기억되고, 학업엔 소홀했지만 심성은 착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뒤로 못 봤는데 지금 잘살고 있는지, 어찌되었는지 궁금하답니다.

▲지역민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우리 고향 영주는 소백산이 있는 천혜의 땅, 유불문화가 공존하고, 사과, 쇠고기, 인삼, 인견 등 어느 지역도 가질 수 없는 우수한 품질의 생산품과 전통문화를 자랑하는 곳입니다.

소수서원과 부석사 등 우수한 정신문화의 유산을 간직한 선비의 고장 영주가 고향인 제 자신이 자랑스럽습니다. 영주의 모든 시민들께서도 고향 영주에 대해서는 최고의 자긍심과 자존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프로필>
1956년 영주 태생
영주남부초(4회), 영주중(20회), 국립철도고교 졸업
건국대 법학과 졸업
건국대대학원 법학과 졸업
1981년 KBS 공채 9기 기획행정직 입사
KBS춘천방송총국 총무부장
KBS신경영기획단차장
KBS인력관리실 부주간
KBS총무국장
2009년 방송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수상- 사회복지유공 ‘국민포장’ 수상(2009년)
가족관계- 부인과 대학에 다니는 아들, 딸 남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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