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이사람]참 사람, 풍기인삼의 신농씨 김 계 하 옹

세상에 참 사람이 있다. 나를 버리고 산다. 남을 먼저 배려한다. 어느 수도승도 수행하기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 나 혼자만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이라면 무엇이 부족했을까.

소백산 및 풍기 인삼의 고장에서 태어난 그는 인삼농사의 신농씨(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삼황의 하나, 사람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으며, 팔괘를 겹쳐 육십사괘로 점을 보는 방법을 만들고, 오현금을 만드는 등 농업, 의약, 음악, 점술, 경제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다.

지나가는 길 과수원이나 인삼밭을 보고 무슨 성분이 부족하고 무엇을 잘못했다고 귀신같이 지적한다. 선대 때부터 인삼농사를 지어온 그는 인삼재배가 전생의 업인 듯 오늘도 풍기를 인삼의 이상향으로 가꾸는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다.

영주시 풍기읍 교촌1리 김계하(金桂河· 82.)옹. 그는 1961년 영주군 풍기 새마을청소년회장으로 경상북도 36대1의 청소년 경쟁에서 선발돼 일본 원예연수 6개월 선진문화농업을 수업했다. 1962년 풍기인삼조합 상무이사에서 1984년 조합장(임기 4년) 3회 모두 17년 근무했다. 그때 풍기인삼전진대제(지금의 풍기인삼축제)를 개최, 4년째 풍기인삼을 홍보했다.

그는 풍기인삼조합 면적을 확대재배 했다. 그가 직접 경작하는 인삼밭만 20만평이 넘었다. 버스 3대가 인삼밭에서 일을 하도록 하루 200여명의 인부를 문경, 충북 제천, 봉화로 실어 나르는 규모는 대단했다. 그리고 임기 중 풍기인삼조합이 미국, 유럽에 수출 길을 여는 등 정상괘도에 올려놓았다. 그는 김계원 육군참모총장 청와대 비서실장 6촌 동생이다.

풍기는 일제 때부터 축구 농구가 전국 우승을 했다. 풍기초등 축구팀이 경북도대항에서 우승을 하고 전국대회에 참전할 때였다. 영주교육장이 도전에서 졌으면 좋았을 텐데 서울까지 가는 것을 걱정했다. 뜻은 교육청은 예산이 한 푼도 없고 김계하 풍기초등 총동창회장이 비용을 다 부담하는 돈 때문이었다. 공, 유니폼 할 것 없이 숙박비 등 뒤치다꺼리 돈을 뭉텅이로 내놓았다.

그리고 풍기광복독립의혈단 채기중 독립투사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사비 7천만 원(비석 돌)등 풍기광복기념사업회를 결성했다. 그 뒤 향토사학자 유계 송지향선생(작고)과 정지옥 영주문화원장(작고), 권기호 한신금고 대표(현 한신장학 재단이사장)가 1억 원을 내놓아 동탑을 세우는 등 그 뜻이 뿌리가 되어 독립운동기념관을 짓는 등 풍기대한광복공원이 열매를 맺었다.

그는 중국 길림성 무송에서 인삼밭 2만평 종포 1천 평을 경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다. ‘중국에서 한다는 것은 다 안 되더라’고 어려움을 회고했다.

38년 전 신경림 시인이 풍기 정감록촌을 찾아왔을 때, 하늘을 찌를 듯한 3개의 교회를 보고 풍기의 4대 기적(인삼, 인견직, 사과, 교회)을 지적했다. 그는 성내교회를 지을 때 반쯤 지을 돈을 뭉텅이로 내놓았다. 장로가 된 그는 하느님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술을 양껏 마시는 장로였다.

부인 김병교씨(전 초등교사)와의 사이에 2남 3녀를 두고, 서울대를 나온 장녀는 검사 사위를 보는 등 다복한 가정이다. 그러나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인간에 대한 뜨거운 정을 베푸는 인생의 삶은 재산이 몰락했다. 20년 전 풍기시내 중심가에 있던 빌딩 등 당시 시가 3백70억 원의 재산이 하루아침에 날아갔다. 재물은 구름과 같고 인생은 한갓 꿈이라고 그는 지난 세월을 웃는다. 그때 충격인지 김옹은 귀가 어두워 잘 안 들린다.

지금은 그마한 모옥에서 풍기인삼조합(조합장 신원균)의 과거 공로에 대한 배려로 조합계약재배 인삼 종포 1천 평 경작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는 하늘과 조합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김옹의 애국정신은 대단하다. 풍기는 한국독립운동 3대성지로 ‘풍기독립단 황정흠(전구동 사람)은 강원도로 도망을 가 근거가 없고, 하루 태극기를 1백장씩 그리던 황순목은 중국으로 도망을 가 자료가 없어 독립유공자 지정을 못 받았다. 옥사1명, 사형선고 7명에 대한 비를 꼭 세우려고 했으나 재산이 파산되는 바람에 돈이 없어 못 세웠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조선의 4대 문루 중 하나인 ‘제운루 기주절제아문(齊雲樓 基州節制衙門’(풍기초등교 자리) 고려 공민왕이 쉬어간 곳을 복원 못하는 영주시를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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