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편지
황동규(1938~ )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背景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
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
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
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 쯤
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姿勢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
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
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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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첫사랑에 빠졌을 때 햇볕이 잘 들어오는 텅빈 강의실에 혼자 앉아
"내 그대를 생각하면 ..." 으로 시작하는 긴 연애편지를 쓴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한참 후 "기쁜 우리 젊은날"이란 영화를 보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주인공 안성기가 황신혜에게 보내는 첫 연애편지의 서두도 이 즐거운 편지로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니 모든 첫사랑의 수준은 다 비슷한 것 같았다.
영화 속에서 안성기는 첫사랑을 만났지만 나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영화와 삶은 이렇게 서로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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