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師弟), 역(易)사제 간 귀한 인연을 듣다

옛말에 군사부(君師父) 일체(一體)란 말이 있다. 선생을 임금 다음으로 생각하고 아버지보다도 더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말이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다하지 못하는 가르침을 선생은 옳고 인간다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된 사람’은 선생님을 평생 은인으로 믿고 ‘사부(師父)’라고도 한다.

지난날 교단에서 가르쳤던 제자가 현재는 스승이 돼 그때 선생님에게 서예를 가르쳐 주고 있다. 이런 묘한 인연 속에서 구순을 바라보며 배움의 끈을 놓지 않고 컴퓨터를 익히고 서예에 열중하는 허윤(87)선생을 찾아가 봤다.

▲태어나고 그리고 37년간 교직

아름답고 소담하게 손질된 정원이다. 제법 나이가 든 나무들이 푸른 잎을 자랑한다. 거실에 들어서니 각종 역사와 고전문학으로 채워진 책장과 책상, 그리고 컴퓨터가 눈에 먼저 들어온다. 삼복중인데도 더위를 즐기며 사는 선비같은 자태이다.

첫 대면에서 기사(記事) 관계라고 하니 정중히 거절한다. 구순을 바라보면서 ‘평생 교학’이란 귀감된 사례가 기자의 관심이다. 염치없이 2차로 방문하니 무거운 입을 겨우 여신다.

허 선생은 경남 김해에서 3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9세 때 한의사인 아버지 내외분과 세 식구가 십승지지(十勝之地) 풍기를 찾아(1943)와 살게 된 것이 영주와의 인연이 됐다고 했다.

교육에 관심 높았던 계삼정(桂三正)씨가 1950년도 풍기 금계동사에서 야학으로부터 시작한 금계중학교가 1953년에 설립됐다. 초창기 1951년도 영어교사로 교단에 올랐다.

허 선생은 “교실은 마을 공회당이며 학생들은 지역에서 배움을 갈망했던 젊은이들이어서 선생과 학생들의 교학열은 대단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954년도에 찍은 빛바랜 졸업사진 한 장을 내 놓고 맨 앞줄에 앉은 선생님들을 보면서 한 숨을 내쉰다. “10명이 넘었던 선생님들 중 살아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요”하면서 노안에 이슬이 맺힌다.

그 후 풍기중과 영주여중에서 사회, 윤리, 도덕과목으로 후학을 양성하다가 1989년도 37년간의 교직에서 정년퇴직했다.

▲기억에 남는 일

자상한 성품을 가지고 오랫동안 교직에 있으면서 어렵고 힘든 일이 많았을 것 같다고 하니 웃으면서 “그 때는 지금과 많이 달랐지요. 학생들이 선생님 말이면 모두 순응하였으니까요. 지금 교육계 현실과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매를 들어 보았지만 그래도 조금 맞아 본 학생들을 만나면 또렷한 기억에 남는다며 더 반가워해요”하면서 입가에 행복한 웃음을 지운다.

또 “그 때 ‘맥 마이스 팀’이라고 우리 이름으로 마철호란 원어민 영어교사가 2여년 같이 있었지요. 외국인이었지만 영어에 관심이 있어 서로 허심탄회했습니다. 그는 항상 한국문화에 취하고 한국사람들의 정에 놀랐다고 말하면서 막걸리도 함께 잘 마셨지요” 하면서 지난날 추억에 잠겼다.

현재 서예교실에서 지도를 받고 있는 김분화씨의 학생시절 모습을 물으니 “영주여중에 있을 때 그는 착실한 제자였습니다. 우연히 4년 전 60대에 가까운 제자를 만나 이제 서예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있으니 지난날 사제지간(師弟之間)이 현재는 역(逆) 사제지간(師弟之間)이 되었습니다”하면서 만족해 한다.

학생시절에 존경했던 허 선생을 만난 소감에 대해 김씨는 “옛 모습 변치 않으셨고 그때 너무 자상함에 반했던 것이 요사이 이렇게 뵙게 되니 더 친밀감이 있고 아버지처럼 모시고 있습니다”라고 한다.

지금까지 각별한 제자들도 많았을 텐데요 하고 물으니 “금계중 졸업 1회 제자였던 분이 지금 영주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의리 있고 선생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는 사람은 처음 보았습니다. 이미 작고(作故)하셨지만 송지향님, 박재흠님 등 나를 포함하여 매 년 설, 추석에 꼭 식사 초청을 합니다, 그리고 몇 년 전 처음 생긴 금강산 관광, 그 후 개성공단 관광까지 잊지 않고 보내주었으니 참 고마운 분이지요. 이제 남은 사람이라고는 나뿐인데도 지금까지 때가 되면 잊지 않고 연락이 옵니다”한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분입니까? 하니 “아마 아실 것입니다. 전 한신상호신용금고 이사장이었던 권기호씨입니다”

▲퇴직 후의 생활

부인 강원순(85)씨와의 사이에 1남을 3녀를 뒀고 친외손자녀 및 그들의 아이들을 포함해 가족이 30여명에 넘는다고 한다. 졸업은 시작이란 말과 같이 퇴직은 곧 시작이란 마음으로 과유불급(過猶不及)을 삶의 지표로 삼고 최근 벗들과 만남, 건강관리를 위한 산책, 정보와 손자녀들과 안부를 묻는 컴퓨터(10년), 수양을 위한 서예(4년)를 취미로 삼고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부인의 내조는 어떠냐고 물으니 “인연으로 서로 만나 격동기에 고생이 많았지요. 그래도 불평 없이 아이들 키워 출가시켜 주었으니 고마운 분입니다. 아내는 천주교신자로 믿음이 대단했고 심지어 구약성서를 자필로 노트에 썼다”며 교심(敎心)이 담긴 20여권의 오래된 노트를 내 보인다.

요즘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아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항상 배우는 사람이 되라. 그리고 올해가 6. 25전쟁 60주년이지요. 그 전쟁의 비참함과 추위와 배고픔을 모르는 것 같아요. 우리들이 겪은 식민지와 전쟁, 격동기의 삶을 전해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더구나 6. 25를 모르고 반미를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전우성 시민기자 lkj100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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