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우리 시 읽기

최영미(1961~)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개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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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나는 그녀의 시를 짝사랑한다.
심적 무장을 완전히 해제한 상태에서 그녀가 읊어대는 노래는 노래가 아니라 슬픔이다. 슬픔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허락이다. 여름을 넘긴 이 세상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경의이고 용서이다.다시 벅찬 사랑이다.
가을은 그렇게 "한 남자의 전부가" 한여자의 가슴에 뭉클박히고
"무작정 눈물"이 나오게 하고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그만 모든 걸 허락"하게 만든다.
가을이 오면 나는 안계들에 갈 것이다.
가을 바람앞에 고개를 숙이고
더 겸허해질 것이다.
아직 사랑하지 못한 그 모든 것들을 다시 사랑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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