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겨서 포옹하고
들리는 박동소리
흐려진 숨결마다 뜨락은 젖어들고
달무리
글썽한 눈물
한 하늘 여는 마음.
가득한 물소리 중

"순흥에 꽃 배달가야 하는데 어쩌죠." 황정희 시인의 말이다.
그녀는 영주기관차 사무소 앞에서 예원화원을 운영하고 있다.

"옆자리 앉아도 돼죠?"
그녀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필자는 트럭 옆자리에 얼른 올라앉았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저야 시간도 절약되고 좋지만 안 기자님이 불편하실텐데-"
"저도 좋습니다."
오늘은 트럭을 타고 취재를 다해본다. 동행취재가 별건가...

▲ 황정희
황정희씨는 "가득한 물소리"로 최근 월간문학 신인상 시조부에 당선됐다. 이른바 등단을 한 것이다.

"가득한 물소리를 포함해서 7편의 시조를 냈어요. 제일 위에 가득한 물소리가 있었습니다."

월간문학 7월호에 실린 그녀의 작품 심사평을 보면 전체적으로 작품이 고르다고 나와있다.

그녀가 처음 글을 쓴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다.
"음악이나 무용반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다 차고 자리가 없었어요. 그래서 문예반에 들어갔어요."

그렇게 들어간 문예반에서 그녀는 두각을 나타낸다.
"저는 4학년이었는데 6학년 언니, 오빠들보다 칭찬을 많이 받았어요. 처음 선생님이 내 준 시제가 '태양'이었는데 일단 붉으니까 빨간 알사탕에 비유해서 글을 썼던 것 같아요. 정희야 글 많이 써라 하시던 선생님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녀는 영광여중에 입학해서 도내 백일장에서 시 "코스모스"로 상을 받기 시작하여 참 많은 상을 받았다.
"시 써서 상 받고 웅변해서 상 받고 중학교 때 상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 그녀가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글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쓰지 말자 작정한 건 아닌데 고등학교 때는 거의 글을 안 썼어요."

결혼 후 그녀는 다시 글을 쓰게 된다. 영주 주부독서회 회원으로 활동하게 되면서부터다.

"주부독서회 활동을 하면서 글을 많이 썼어요. 영주서 열리는 백일장에도 많이 나갔죠."

영주문협에서 주최하는 죽계백일장과 영주 청년회의소 주최 J.C 백일장에서 받은 상이 정리하면서 세어보니 13장이나 되더라고 한다.

"1999년 경상북도 여성 백일장에서 도지사상(시 부 장원) 부상으로 대형 T.V를 받았거든요. 그전에는 시어머니께서 글 쓰는 걸 별로 좋아하시지 않았는데 T.V를 타 가니까 굉장히 좋아하셨어요."라며 환하게 웃는다.

황정희 시인은 그해 가을 전국 시조 백일장에서 2등 상인 차상을 타 부상으로 상금 30만원을 받았다.

"1999년이 저한테는 행운의 해였던 것 같아요."
하지만 필자는 그녀가 마로니에 백일장에서 대상을 받음으로써 그녀의 이름 석자를 확실히 알게됐다.
그 후 그녀는 또 한번 나를 놀라게 했다. 무심히 들여다본 신문에서 그녀의 이름을 발견했다.

2000년 3월 중앙일보 백일장에서 겨울나무로 장원을 차지했던 것.
부전자전이 아니라 모전여전이다.
그녀를 닮아 큰 딸 강사랑(영주여고)양도 글을 잘 쓴다.
"저보다 나아요. 장원도 여러 번 했어요.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싶어해요. 드라마 작가가 꿈이랍니다."

황정희 시인은 농업기술센터에 근무하는 남편 강병직씨와 사이에 1남 2여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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