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창수(73, 전 영주문화원 이사)

소백산 제2연화봉에서 도솔봉으로 이어지는 중간에 잘록하게 마치 말 안장 모양의 죽령은 문경 조령, 추풍령과 함께 소백산맥 역내(域內)에서 한양을 오가던 3대 관문이었다. 그 중에 죽령은 구름도 쉬어 간다는 철령보다 4m나 높은 689m이고, 조령 632m, 이화령 548m, 추풍령이 300m이다.

여지승람 등 문헌에 의하면, 신라 아달라왕 5년(158년)에 죽죽(竹竹)이 처음으로 죽령의 길을 열었다고 한다. 죽죽이는 이 길을 개척한 뒤, 곧 순사(殉死)하여 고갯마루 서쪽에 그의 넋을 기리는 죽죽사(竹竹祠)를 세웠다고 하나, 지금은 그 장소를 알 수 없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죽령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들을 만날 수 있다. 고구려 전성기인 광개토왕 때는 죽령이 신라와 국경 지대로(한때는 竹嶺, 靑松, 寧海, 盈德까지도 高句麗의 領土이었다는 기록이 있음) 신라의 진흥왕이 백제와 연합하여 거칠부(居柒夫)가 고구려를 공격하여 죽령이북 십여 고을을 빼앗았다고도 하고, 고구려 영양왕 원년(590년)에 장수 온달이 죽령~계립령(鷄立嶺)의 이북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고도 하며, 백제의 잦은 침략으로 신라의 선덕왕은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어 백제를 견제해 주도록, 협조를 요청했으나 고구려 보장왕은 <본래, 우리 땅인 죽령은 왜 돌려주지 않느냐?>하면서, 도리어 김춘추를 옥에 가두어 버렸다는 등의 기록으로 보아 당시 죽령은 군사적 요충지로 삼국의 대립 이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문헌에 인물의 고장이라는 안동의 선비들도 모두 죽령을 이용하였고, 연산~중종 연간에 명신 농암 이현보와 이퇴계같은 이들도 한양을 오갈 때는 죽령으로 넘나들었고, 이현보가 사직을 하고 향리로 돌아올 때, 배를 타고 오다가 단양에서 내려 죽령을 넘어 올 때, 풍기군수 주세붕이 술과 안주를 가지고, 고갯마루까지 마중을 나가서 회포를 풀고 시(詩)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농암집과 신재집에 전하고 있다.

이퇴계가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충청관찰사로 있던 그의 중형 온계가 고향인 예안을 왕래할 때, 마중을 나가서 시주(詩酒)를 나누던 촉랭대(矗冷臺)가 죽령 중간 지점에 있다고, 순흥지가 전한다.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들이며, 공무에 종사중인 관원들, 부임과 퇴임의 고을수령들, 해륙(海陸)의 온갖 물산을 유통하는 장사꾼들, 물화를 운반하는 인마(人馬)들로 죽령은 늘 행객(行客)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기에 고개 이쪽, 저쪽에는 주막들이 들어서서 영업을 하였고, 마방에, 짚신장사까지, 길손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집들이 즐비하였다.

1934년경 신작로가 열리고, 1942년 중앙선 철길이 뚫릴 때까지, 옛길에 행객이 많아 주막거리가 유지되었다.

2001년 12월. 중앙고속도로(대구~춘천)가 개통되어 서울까지 소요기간이 2시간대가 되니, 이제 서울은 완전 일일생활권이 되었다.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그 옛날 선비들이 괴나리봇짐을 지고 짚신 몇 컬레를 매달고 훨훨 걸어서 다니던 모습을 상상해보면, 꿈같은 이야기이다. 지금은 영주시에서 관광객과 시민을 위하여 죽령옛길을 매우 훌륭하게 정비해 놓았다. 역사(歷史)는 이렇게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참고문헌: 영주영풍향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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