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창수(73, 전 영주문화원 이사)

아미타여래상(阿彌陀如來像)은 부석사 무량수전의 주불(主佛)이다. 이 불상의 높이는 2.78m, 광배높이 3.8m, 무릎 폭 2.06m의 소조(塑造)불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높이 평가되는 주불로 국보 제45호이다.

무량수전에 동향(東向)으로 불단(佛壇)을 차리고 그 위에 가부좌하여 수인(手印)을 항마촉지(降魔觸地)로, 나발의 머리위엔 육계(肉계)가 큼직하고, 풍만한 면상에 정안정시(正眼正視)눈에는 자비와 위엄이 풍긴다. 두꺼운 입술에서 고려불상의 특징이 보이며 두 귀는 길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구전에 의하면, 두 손이 전화(戰禍)로 파손되는 등 손상을 입어 조선시대에 보수를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 불상의 원래 모습이 항마촉진 인(印)을 취하였는지는 불확실 하다고 한다. 한쪽을 벗은 법의(法衣)는 전면에 평판을 겹친 것처럼 평행선을 그리며 흘러내렸고 두 무릎의 옷 무늬는 평행선으로 각각 밖을 향하여 흘러내렸다. 등 뒤에는 목조 광배(光背)가 따로 마련되었고 신광(身光) 두광(頭光)을 원권(圓圈)으로 구별하여 각각 유려한 보상화(寶相花)문을 조각했으며, 그 안에 두광에는 三체의 화불(化佛)을, 신광에는 四체의 화불(化佛)을 부착 시켰던 흔적이 있으며, 변두리는 불꽃무늬로 싸여있다.

대좌는 앞면이 2.37m, 측면이 2m, 높이 1.05m의 토석(土石)을 혼용한 수미단(須彌壇)의 원형이 남아있고, 윗면에는 주위에 신라 때 녹유(綠釉)벽돌이 깔려있으나 불상 무릎이하는 뒤에 설치한 목조 불단이 가설되어있어 밖에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매우 정교한 수법을 보이는 불상으로 소상(塑像)이란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왜정 때 일본학자는 이 불상을 수인(手印)을 보아 석가여래상이라고 잘못 알았으나, 이 불상이 모셔진 본전(本殿)의 전호가 무량수전인데다가 불단배치가 서쪽에 자리하여 동향으로 앉혀 있음이 그러하려니와 보처(補處)가 없이 독존으로 봉안 되어있음 등으로 서방정토 극락세계교주인 무량수불, 즉 아미타여래상임이 확실하다. 이 불상의 조성연대에 대해서는 고려시대로 알려져 있으나, 근래 우리나라 권위 있는 학자들은 신라시대로 올려 보고 있다.

황수영 박사(전 동국대학교총장)는 <창건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봉안되어 온 것으로 추정 된다고 전제하고, 고려중기의 조성이라 함은 봉안된 건물인 무량수전의 연대에서 발설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이 본존의 위치와 방향, 그리고 소조(塑造)라는 재질, 또 보존의 장량(丈量)이나 그 양식 등은 모두 신라 창건 당초의 것을 가장 충실하게 전하여 왔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원형의 고수(固守)는 한층 나아가 그 불신(佛身)에 있어서 두부(頭部)와 오른 손등 불신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창건이래, 여러 차례 재난으로 중수를 거듭했던 사실이 짐작되나 그때마다 이 불존 상(像)은 크기와 양식에 있어 근본적인 변형, 내지 전혀 새로 조성은 이루어지지 않고 시대에 따라 중수만이 가해져 왔다고 추정되는데, 1916년 무량수전을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1358년(공민왕7년)적병에 의한 화재로 본존 두상(頭像)이 분리되어 1376년(우왕2년) 원융국사(圓融國師)가 개금개조(改金改造)를 하였다.”라는 기록은 이를 잘 뒷받침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부분에서 <1916년 무량수전을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묵서명에서 “1358년(공민왕7년)적병에 의한 화재로 두상(頭像)이 분리되어 1376년(우왕2년) 원융국사(圓融國師)가 개금개조(改金改造)를 하였다.”라는 기록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즉, 원융국사(964년~1053년)는 신라의 국사(國師)로 여러 임금으로 부터 융숭한 예우를 받았으며, 1041년(정종7)이곳 부석사로 와서 주석(住錫)을 하다가 1053년(문종7)입적 하였다.

부석사 동쪽 구릉 넘어 밭 가운데 원융국사 비(碑)가 있다. 높이 188cm, 너비 97cm이다. 김원용(金元龍) 박사(전 한국고고학회 회장)는 <한국미술사>에서 불상의 조성연대를 “신라 말까지로 올려 볼 수 있다”고 했으며, 김홍섭(金弘燮)교수는 <한국의 불상>에서 “조성시기를 10세기경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1723년(조선. 경종3)에 통정(通政)정상주(鄭尙周)를 비롯한 94명이 정성(精誠)을 모아 불상을 개금(改金)한 사실이 <무량수전불상개금문>에 전하고, 최근에 도금(塗金)한 것은 1975년 6월~9월 15일에 주지 영현, 화주(化主)운영(云榮)등의 정성으로 이루어졌다. 아미타여래상(阿彌陀如來像)은 우리나라의 보물중 보물이다.

<參考. 韓國民族文化 大百科事典. 榮州榮豊鄕土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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