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미(시민)

나는 5.18의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잠시라도 내가 부정했던 진실을 인정하기가 싫었고 그저 바쁜 일상과 시간을 핑계 삼아 외면하면 되는 줄 알고 살아갔습니다.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 가르는 데만 집중하는 동안 피해자는 외로웠고 참담했으며, 가해자는 자유롭고 안락했으며 나는 또 다른 가해자인 방관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광주 5.18 민주 묘역에서 우리들의 이웃으로 친구로 살아갔을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아이들, 학생들, 신혼부부, 임산부를 가리지 않고 학살된 수많은 희생자와 마주했습니다. 전두환 신군부는 언론을 통제하였고 꼭두각시가 된 언론은 국가전복을 꾀하는 ‘폭도’들로 매도하고 우리와 갈라놓았고 우리는 또 호도된 보도를 믿으며 살았습니다.

몇 년 전 영주로 귀촌해서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이름을 5.18 민주 묘역에서 처음 들었고 살아 있었다면 환갑이 되었을 22살 영주의 청년 김의기를 만났습니다. 영주 부석면 용암리에서 태어났고 영주중앙초, 영주중학교를 거쳐 가족들의 기대를 품고 형제 중 유일하게 대학(서강대)에 진학하여 무역을 전공했지만, 농민운동가를 꿈꾸었던 청년, 그는 영주가 아닌 광주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980년 5월 그는 농민 운동을 위하여 광주에 있었습니다. 함께 농민 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폭도라는 굴레를 쓰고 쓰러져 가던 광주의 참상을 국민에게 알려달라고 김의기에 부탁했고 그는 서울에서 모두가 외면하고 눈을 감았던 엄혹한 시간에 눈을 뜨고 용기를 내어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전단으로 만들어 기독회관 6층에서 세상에 알리기 위해 애쓰다 눈발처럼 흩뿌려진 전단과 함께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문익환 목사는 이한열 열사의 장례연설에서 한 그 유명한 ‘열사여’ 연설에서 그의 영혼을 불러 세웠습니다.

영주로 돌아온 뒤, 민주 묘역에서 그를 만난 여운이 가시지 않아 그의 모교인 서강대에 연락해보았고 ‘의기촌’이란 공간이 마련되어 매년 김의기를 기리고 있었으며, 그를 학습하고 배우는 동아리와 5월 축제 기간에 의기제를 지낸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영주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초대를 받아 의기제에 참석했고 그곳에서 서울과 부산에 산다는 김의기의 누나들을 만났습니다. 내가 그를 알지 못했을 뿐 김의기의 이름은 잊히지 않고 있었습니다.

5월 30일이면 청년 김의기가 꿈을 다 펼치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난 지 39주기가 됩니다. 그가 태어나고 자라며 미래의 꿈을 다졌고 우리 곁을 떠나기 전까지 그리워하였을 그의 고향 영주도 그의 이름을 잊지 않고 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39년 전 김의기는 외로운 외침이었지만 지금은 우리 모두 함께하는 집단지성의 외침으로 치욕스런 멍에를 벗어던지고 진실과 정의가 살아 있는 세상, 다음 세대에 부끄럽지 않은 시대를 만들 수 있을지를 생각해 봅니다.

지금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어떻게 누리고 그 성취가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는지 우리 스스로 새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고 하여 남의 일이라고 할 것입니까? 그를 여전히 빨갱이거나 폭도로 여기겠습니까? 5.18을 여전히 북한의 지령을 받은 자들의 폭동이라고 할 것입니까? 이미 과거의 일이니 덮자고 할 것입니까?

지금도 여전히 그는 우리에게 묻고 있는 듯합니다.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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