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205] 장수면 두전3리 경림이·일계동·고지골

둥글게 살면 자손이 번성한다는 고지골의 전설
세 마을이 삼합(三合)하여 살기좋은마을 이뤘다

 

경림이마을 전경
일계동 전경
고지골마을 전경

장수면 두전3리 가는 길
장수면사무소에서 영주 방향으로 500m 가량 가다보면 도로 좌측에 큰 도정공장이 보인다. 그 앞에서 좌회전하여 강둑으로 난 길을 따라 200m쯤 올라가면 두전3리 경로당이 나온다.

두전3리는 옥계천을 따라 올라가면서 좌우 산자락에 형성된 마을이다. 지난 17일 두전3리에 갔다. 이날 마을 회관에서 권석수 이장, 송명선 노인회장, 이경순 부녀회장, 김흥년 새마을 지도자 그리고 여러 마을사람들을 만나 3합(三合)으로 이룬 마을의 전설을 들었다.

두전3리 표석
일계동 고갯길

역사 속의 두전3리
영주지(榮州誌)에 보면 「영주는 삼국 때는 날이군(捺已郡), 통일신라 때 날령군(捺靈郡), 고려 때 강주(剛州)-순안(順安)-영주(榮州)라 불렀고, 조선 태종13년(1413) 경상도 영천군(榮川郡)이 됐다」고 기록했다. 아마도 조선 초기까지는 두전리에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중기 군(郡)의 행정구역을 방리(坊里)으로 정비할 때 이 지역을 두전리 두전방(豆田坊)이라 한 것으로 봐서 1700년경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 뒤(1800년경) 면리(面里)로 바뀌면서 두전면 두전리가 됐다가 1896년 조선말 행정구역 개편 때 두전면 본리(本里)라 불렀고,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장수면 두전3리가 됐다. 김세원(72) 노인회 총무는 “한 때 일계실과 경림이가 두전3리이고, 고지골은 두전5리였으나 1980년 이후 농촌인구 감소로 5리(고지골)가 3리에 통합됐다”고 말했다.

삼합으로 지은 회관

장수면과 두전리의 유래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통합 때 옛 영천군의 두전면과 호문면(好文面)을 합쳐 장수면(長壽面)을 새로 만들었다. 당시 이 지역 유지들이 모여 면명(面名)에 대해 논의한 결과 저명한 ‘장수원’에서 유래하여 ‘장수면’이라고 명명했다. 그럼 장수원의 유래를 알아보자.

장수원(長壽院,화기2리) 입향조 전의이씨 사남(嗣南,1539-1629)과 그의 아들 경록(景祿,1563-1648) 두 부자(父子)는 임진왜란 때(1592-96) 지역 의병장으로 나아가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사남은 90세까지 장수를 누렸고, 아들 경록 또한 85세까지 장수하여 마을이름이 ‘장수원’이 됐다.

‘두전’은 콩 두(豆)자에 밭 전(田)을 쓴다. 두전리의 지명을 조사해 보니 ‘팥밭골’이라는 지명이 한 곳 있고, 야산이 많아 밭이 많은 지역이다. 그래서 콩밭·팥밭이 많다하여 콩 두(豆)자 두전리(豆田里)가 됐다고 한다.

버망골

‘둥글게 살라’는 고지골(匏谷) 
장수면사무소에서 장안로를 따라 1km 가량 가다 왼쪽으로 보이는 마을이 ‘고지골’이다. 경북지명유래편람에 보면 「조선 때 야성송씨가 마을을 개척했다. 마을에 자손이 귀해 하늘에 기도했다. 어느 날 노스님이 이 마을을 지나다가 ‘박과 같이 둥글게 살면 자손이 번창한다’는 말을 남기고 갔다. 마을 사람들은 스님의 말씀 따라 마을 이름을 ‘고지골’이라 지었다. 또 예전에 고지사(古智寺)라는 절이 있어 고지골이 됐다는 설도 있다」고 기록했다.

이 마을 송명선(87) 노인회장은 “고지골의 야성송씨는 송석충(宋碩忠) 영주 입향조님의 장남 엄(儼) 선조의 후손들이다. 저희 선대(先代)께서 1690년경 소태재(小台嶺,영주초곡)에서 가래로 옮겨 살았고, 그 일족이 다시 고지골로 옮겨와 살았다”면서 “저희 증조부 때 고지골로 왔다고 하니 1850년경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고지골 백종삼(73) 씨는 “고지골은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미풍양속을 이어온 마을”이라며 “어릴 적 달봉잔등에 올라 망월을 부르고 쥐불놀이를 했다”며 “설날이면 작은집 큰집 돌아가면 차례를 지내고, 며칠동안 떼지어다니면서 세배를 했다”고 말했다.

이 마을 김윤석(70) 씨는 “예전에 달봉잔디에서 화전놀이를 할 때 어머니들이 막걸리 버지기를 이고 올라갔고, 국수와 부치개 등을 먹으면서 온종일 노래 부르고 노는 것을 봤다”면서 “그 때 화전놀이는 1년 중 단 하루 (여성) 어머니들의 소풍날이었다”고 말했다.   

흙으로 지은 집판담집(150년)

소쿠리형 마을 일계실(逸溪室)
일계실은 우리나라 마을의 전형이다. 예전에 선조들이 터를 잡을 때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아 외적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을 1순위로 꼽았고, 풍수해로부터 안전한 곳을 2순위로 삼아 자손만대 번성을 염원했다. 영주시사에 보면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이 바르고 곧게 흐른다 하여 일계(逸溪)라 불렀으며, 마을도 일계실(逸溪室)이 됐다」고 적었다.

이 마을 출신 박병수(60,영주시청) 씨는 “일계실은 안동김씨와 전주류씨 두 성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면서 유학(儒學)을 장려하고 서당을 운영하는 등 유풍(儒風)이 강한 마을”이라며 “할아버지 세대 때는 50여 가구가, 아버지 세대 때는 30가구, 지금은 8가구가 산다”고 말했다.

일계실 박병진(63)씨는 “예전에 마을 뒤로 넘어가는 새마을도로를 닦을 때 어르신들께서 ‘소쿠리허리가 끊어지면 마을이 망한다’고 하시면서 반대하셔서 설득하는데 힘들었다”며 “일계실 안동김씨는 예전에 높은 벼슬을 지내셨고, 후학양성에도 힘썼다”고 말했다. 김흥년 새마을 지도자는 “예전에 ‘두전서당’이 고지골 아랫골에 있었는데 신교육이 시작되면서 서당은 없어졌으나, 일계실에 사는 김성한 어르신께서 사랑방에서 서당을 열고 학동들을 가르쳤다. 그 아들 김봉동 어르신(1960년대)까지 서당 명맥이 이어졌었다”고 말했다.

옛 고지골 서당터

숲이 아름다운 경림이(景林)
소백산 도솔봉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가 동남으로 달리다가 연화산 가까이에 이르러 새의 머리모양을 닮은 얕으막한 봉우리를 여러 개 만들었는데 그 중 경치(景致)가 가장 좋은 곳을 경림(景林)이라 하였고, 그 아래 생긴 마을을 ‘경림이’라 했다. 이 마을 이유창(67) 씨는 “경림이는 소백산의 정기(正氣)를 오롯이 받은 마을”이라며 “뒷산 형상이 호랑이를 닮았다하기도 하고, 산림이 울창하고 숲이 아름다워 경림(景林)이라 부르게 됐다”고 말했다.

일계교

여성지도자 이경순 씨
송명선 노인회장은 “우리마을에는 문화재도 없고, 높은 벼슬에 오른 선비도 없지만 남의 어려움을 내일같이 돌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푼 인간문화재 같은 사람이 있다”면서 “ 우리 지역을 넘어 경북생활개선연합회 수석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경순 씨가 바로 주인공”이라고 칭송했다.

이 마을 이영자(62) 씨는 “이경순 회장은 넓은 품을 가진 봉사의 여왕으로 각계각층의 칭송이 자자하다”면서 “농부로서의 역할, 마을 부녀회장으로, 면 생활개선회장, 면 적십자봉사단회장, 주민자치위원, 축협대의원, 농정심의위원, 농협단체협의회 여성부회장, 수돗물평가위원, 농산물브랜드심의위원 등 열 손가락이 모자란다”고 말했다.

두전3리 사람들

삼합(三合)이 맞은 마을
부처님의 제자 문수보살은 “삼합이 맞으면 천하에 못할 일이 없다”고 했다. 권석수(64) 이장은 “두전3리는 삼합의 선을 이룬 마을”이라며 “일계실(8집), 고지골(17집), 경림이(7집) 3개 마을이 화합하여 삼합(三合)을 이루니 살기 좋은 마을이 됐다. 특히 전통예절과 미풍양속을 이어가고 있으며 효(孝) 정신이 마을의 중심이고 자랑”이라고 말했다.

“교회 다녀오는 길”이라며 좀 늦게 도착한 우필희(80) 할머니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효도 잘 받고 있지만 온몸이 이곳저곳 아프다”면서 “세상이 변해도 부모를 섬기는 마음이야 변함이 있겠냐?”고 말했다. 일제와 6.25을 겪은 김한희(89) 할머니는 “우리 세대 때는 거름도 비료도 기계도 없었고, 오직 맨손으로 농사지었으니 오죽했겠냐?”며 “예전 보릿고개를 생각하면 지금은 천국에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경순(61) 부녀회장은 “두전3리는 3마을이 화합하고, 3대가 효도하고, 3이웃이 서로돕는 등 삼합이 척척 잘 맞는 마을”이라며 “마을을 잘 이끌어 주신 권석수 이장님, 송명선 노인회장님, 김흥년 지도자님께 감사드린다. 또 마을회관을 짓는 등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합력하여 두레에 힘써 주신 홍성숙 씨, 이영자 씨, 박필자 씨, 이인숙 씨 그리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회관에서 나와 송 회장과 고지골에 갔다. 아랫골에 있었다는 서당 자리를 둘러보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송순득(89) 할머니집에서는 옛 토담집(판담집) 모습도 자세히 살펴봤다. 150년 전에 지었다는 이 판담집은 ‘마을의 보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버망골에서 송원흥(77) 씨를 만났다. 약통을 지고 노익장(老益壯)을 자랑했다. 송 씨는 “지황 등 3천여평 농사를 짓는다”며 “지금 농촌은 일손이 부족해 베트남 여성인력을 4-5명 정도 쓴다”고 했다. ‘수박 순치는 베트남 여성들,’ 우리 농촌의 풍광이 바뀌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버망고개’를 넘었다.

권석수 이장
송명선 노인회장

 

이경순 부녀회장
김흥년 새마을지도사
김세원 노인회총무
김한희 할머니
우필희 할머니
송원흥 씨
백종삼 씨
김윤석 씨
이유창 씨
박병진 씨
홍성숙 씨
이영자 씨
박필자 씨
이인숙 씨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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