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에서 버스타고 식료품 가득 구입해
교사들의 숙식장소, 학생 등하굣길 쉼터

풍기에서 봉현초등학교 앞 도로를 지나면 한천리가 나온다. 그 도로를 따라가면 유전리가 나오고 내리막에 봉현전담의용소방대가 보인다. 굽이 진 도로를 따라 조용한 마을로 들어서면 한눈에도 오래 돼 보이는 시골점방이 있다. 간판은 없다.

나무틀로 만들어진 문을 열고 들어서니 ‘딸랑’하며 작게 종소리가 울린다. 잠시 후 가게 안에 있는 방문에서 할아버지 한분이 나오신다.

 

박옥흠&권기섭 부부

▲사람들로 북적이던 곳
가게가 있는 도로변과 그 사이 길에는 옛날 나무창들이 곳곳에 보인다. 고기들이 진열됐던 식육점과 유리창으로 내부가 들여다보이는 곳은 가게 등을 운영했던 흔적들이다. 이 조용한 마을에 오랫동안 가게를 지켜온 권기섭(84)·박옥흠(83) 부부는 봉현남부초에 자녀들을 보내고 폐교 후 요양원으로 바뀌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마을 인근에 많은 담배를 심다 사과나무를 심고, 큰 장이 설 만큼 번성했던 마을에서 한적한 마을로 변할 때까지도 가게를 지켜왔다.

권씨 할아버지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며 “할머니는 보건진료소에 갔다”고 했다. 보건진료소에 들리니 할머니가 약을 받아 일어났다. 할아버지를 만나고 왔다고 하니 가게와 마을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에는 동네가 정말 컸어요. 면소재지 수준이었죠. 100여 호쯤 됐는데 이젠 젊은 사람들은 다 나가고 학생들도 없지요. 우리 5남매도 이 학교를 다 나왔어요. 애들을 키울 때는 학생들도 많고 사람들로 북적거렸는데 점점 줄더니 초등학교에 들어갈 사람이 없으니 폐교가 됐잖아요”

가게 앞 도로로 사람들이 많이 오갔다. 장도 설 정도였다. 장이서면 비단, 철물도 팔러 오고 사람들이 몰려 씨름도 했단다. 그 당시에는 모두 장사가 잘 됐다. 학생들도 많고 교사들도 많았던 때라 할머니는 가게를 하면서도 여러 일을 해왔다.

“1973년부터 교사들의 밥을 해줬어요. 처음에는 생활할 사택을 짓는 동안 잘 곳이 없어 머물고 밥도 해결하고 했지요. 지서나 출장소 직원들을 대상으로 밥을 해준 것이 10년이네요. 사과농사 전에는 담배농사를 많이 했는데 담배기사 한명이 하숙을 했어요. 그 사람이 담뱃잎을 파는 날이면 구경손님을 40명 불러 밥을 해줬어요. 그때는 정말 바빴어요”

당시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을 피우고 밥을 했다는 할머니는 된장찌개에 김치, 나물하고 지금보다 큰 밥그릇에 수북하게 퍼주면 다 잘 먹었단다. 영주 진흥상회가 집인 교사는 초임발령을 받아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봄철이 되면 미역, 명태, 김 등의 반찬을 가져와 반찬걱정을 덜어 고마웠다고.

“한 초임여교사는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4년여를 하숙하고 대구로 갔는데 이곳이 그립다며 편지도 자주하고 놀러오라고 약도까지 써서 보내왔어요. 그래서 약도대로 버스타고 갔지요. 옛날 가게하면서 장도 봐야하고 밥을 먹을 시간도 없이 참 바빴는데 그래도 나를 잊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네요”

▲가게 곳곳마다 추억이
가게는 할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살던 곳이다. 6.25전쟁 때 폭격으로 허물어지고 다시 돌담을 쌓아 집을 지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 옛날 마루에 세워져 있던 기둥이 그대로 있다.

“가게를 한지 벌써 50년도 넘었네요. 옛날에는 가게도 7곳이고 식당도 3곳, 정육점도 2곳, 다른 상점들도 있었지요. 내가 감천에서 시집왔는데 그때 만해도 먼지 날리는 비포장 길에 사과나무를 심기 전이라 빈농들이 많았어요. 지금은 사과 때문에 부자가 많이 됐지요”

할아버지는 새마을지도자로 낡은 집도 뜯고 새로 지붕 올리는 일 등 마을봉사로 부역을 많이 했다. 할아버지가 20여년 간 지역을 위해 봉사할 동안 할머니는 가정을 돌보고 농사와 가게를 병행해야 했다. 너무 힘들 때는 할아버지께 하소연을 한 적도 있다고. 그래도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사회활동으로 받은 표창장이 벽면에 가득했다고 말한다.

봉현남부초는 한때 학생들이 많아 오전, 오후반을 했었단다. 이 학교를 졸업한 중고생들은 풍기로 시내버스를 타고 통학했다. 가게 앞에서 버스가 멈춰 차표도 팔았다. 잔돈을 바꿔주려고 농협에서 바꾼 10원짜리 동전 2만5천원을 들지 못해 포대를 머리에 이고 왔다.

“아침에 사과밭으로 약을 치러 갈 때면 문을 닫고 가요. 그런데 그 사이 학생들이 큰 돈 들고 와서 바꾸지 못해 차를 못 탈까봐 약을 치다말고 헐레벌떡 집에 뛰어와서 표를 팔고 다시 가요. 그렇게 바쁘게 살았어요”

할아버지는 학생들을 위해 대합실을 만들었다. 난로도 하나 설치했다. 연탄을 때다보니 너무 많이 들어가 나무난로를 바꿨다. 가게 옆에는 대합실로 사용됐던 곳이 그대로 있다.

“추울 때 학생들이 버스를 기다리며 얼마나 추웠겠어요. 그래서 만들었지요. 나무난로를 종일 피워 놨어요. 한번은 초등학생들이 도랑에 가서 썰매를 타다가 빠져서 흠뻑 옷이 젖어 왔어요. 못 쓰는 축구공을 가져와 난로에 넣었는데 검은 연기가 가득해 얼마나 놀랬게요”

불은 대합실 입구 옆에 놓아둔 번개탄으로 옮겨 붙어 집까지 탈 뻔 했다. 그래도 당시 가게 아래채에서 기름 장사를 해서 소화기가 비치돼 있어 바로 끌 수 있었단다.

 

▲50년 넘은 세월이 흘러
할아버지가 병원을 갈 때를 제외하고는 가게는 계속 열려 있다. 이제 장사도 예전 같지 않고 밤이 되면 손님도 없고 마을도 더욱 깜깜하다. 가게를 오래했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는 담배를 팔지 않는다. 가까이에서 담배만을 파는 곳이 있어 허가가 나지 않는단다. 가게운영에는 어렵지만 할머니는 담배를 팔면 도둑이 잘 드는데 담배를 팔지 않으니 그런 일은 없다고 했다.

“큰 딸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 경주 불국사로 졸업여행을 가게 됐어요. 그런데 중학교에 가야하니 돈이 든다고 못 가게 했던 것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요. 옆에서 뭐라고 말도 못하고 지금 생각해도 참 마음이 아파요”

학생들이 많을 때는 소풍가는 날이면 전날 영주 시장에 가서 장난감을 두 보따리로 가득 사왔다. 차도 많지 않을 때라 날이 저물어서야 왔다. 막내 둘만 있어 호롱불을 켜지 못해 가게는 컴컴한 채였다. 할머니에게는 소죽도 끓이고 밥도 해야 하는 일이 남았었다.

할아버지는 풍기에서 소주, 맥주를 자전거에 싣고 히티재를 넘어오다 잠이 든 적도 있다. 가게에는 먼 시장에서 사온 고등어, 동태, 오징어 등 생선과 화장품, 옷도 가져다 놓기도 했다. 마을이 시내와 멀고 농사일이 바쁘다 보니 쉽게 살 수 있는 가게로 손님들은 찾아왔다. 장사가 잘 될 때 할머니는 아침에 베지밀을 하나 마시고 먼 시내로 나가 싱싱한 어물을 사오면 손님들은 좋은 것을 사려고 몰려왔단다.

“그때는 시내버스보다 비싼 좌석버스가 다녔지요. 근데 보따리가 15~16개가 되다보니 너무 많아 안 실어 줘요. 버스에 올릴라 치면 야단을 쳐요. 그래서 배추 열 포기가 든 자루를 운임 비용으로 준다고 해도 어렵다고 했어요. 아는 버스기사가 풍기까지는 실어준다고 한 적도 있지요. 시골인데도 감자, 무, 파, 부추, 배추, 어물 등 얼마나 필요한 것이 많았는지 지금 큰 마트처럼 별 것을 다 팔았어요”

버스가 가게 앞에 서니 잊고 못 샀던 물건을 가게에서 산다. 그래서 외상도 참 많았단다. 그러면 사람들은 쌀이나 좁쌀, 보리쌀을 가져왔다. 장부책이 외상으로 가득했다. 지금까지 못 받은 것도 많다.

“그때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참. 지금은 가게물건이 많지 않아요. 여름만 되면 풍기에서 나와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 시원한 음료수를 사먹지요. 오늘도 영주에서 음료수 장사가 왔는데 가게를 치워야 할 것 같다 하니 그만두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밥이라도 먹고 살만 하면 아랫대에 물려주고 싶지만 가게가 어려우니 그것도 힘들다. 대합실 글자도 떼어지고 검은 연기로 가득한 천장과 벽은 그대로 인채 남겨져 있다. 가게 간판이 지금까지 없지만 전화번호에는 ‘서울상회’로 나온다.

인터뷰를 마치자 예천시외버스가 풍기방향으로 지나갔다. 할머니는 “예천손님은 없이 항상 빈차로 지나간다”며 “노인네 둘이 사는 날까지 할 것이니까 먹고 살만큼만 유지됐으면...”하는 것이 바람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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