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169] 문수면 조제2리 ‘멱실’

찾을 멱(覓)자에 집 실(室)자를 써 멱실(覓室)
6.25 전 빨갱이와 싸우고, 6.25 땐 참전용사

멱실마을 전경

문수면 조제2리 멱실 가는 길
멱실 마을은 영주 최남단 안동·예천 경계에 있다. 시내 남산육교에서 문수방향으로 향한다. 노벨리스코리아 앞에서 좌회전하여 월호리 와현-대양리 전닷·화방마을 앞을 지나 삼계삼거리에서 예천방향으로 간다. 강변도로를 따라 2km 가량 가다보면 내성천변에 교회종탑이 우뚝한 마을이 멱실이다. 지난 2일 멱실에 갔다. 이날 마을 경로당에서 김덕환 이장, 김칠성 노인회장, 오진문 할머니, 김필분 할머니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입향조 태경의 모

역사 속의 멱실마을
영주는 삼국 때는 날이군(捺已郡)이라 하였고, 통일신라 때는 날령군(捺靈郡)으로, 고려 때는 강주(剛州), 순안(順安)으로 부르다가 조선조 태종13년(1413) 영천군(榮川郡)이 됐다. 1650년경 군(郡)의 행정구역을 방리(坊里)으로 정비할 때 영천군 진혈리(辰穴里) 멱곡방(覓谷坊)이라 부르다가 1750년경 면리(面里)로 개편할 때 진혈면 멱곡리가 됐다. 조선말 1896년(고종33) 조선의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경상북도 영천군 진혈면(辰穴面) 미곡동(彌谷洞)으로 개칭되었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문수면 조제2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덕환 이장은 “조제2리는 멱실(경주김씨,22가구)과 삼계(三溪,영해박씨,15)와 금영골(今寧谷,예천임씨,20) 등 세 전통마을과 최근에 생긴 하늘꽃마을(14)로 이루어져 있다”면서 “전통마을 세 마을은 모두 오랜 집성촌으로 유교적 풍습이 많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고향집

지명유래
예전부터 ‘내성천 연안에 12실(室)의 피난처가 있다’는 전설이 전해 왔다고 한다. 경북지명유래편에 보면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경주김씨와 예천임씨가 자손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존할 수 있는 피난처를 찾던 중 산수 수려한 이곳에 터를 잡고는 실(室)의 마을을 찾았다 하여 찾을 멱(覓)자에 집 실(室)자를 써 멱실(覓室)이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주에는 크고 작은 마을 500여개가 있는데 멱실 마을의 경우, 당시 삶의 현실을 마을 이름에 적용한 특이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마을 김한식(69) 노인회부회장은 “예전에 피난처란 ‘숨어서 살아남을 수 있는 땅으로 전쟁이 나도 안전하고, 흉년이 들지 않고, 전염병이 들어오지 못하는 곳’을 의미했다”며 “멱실마을은 지금은 교통이 좋아졌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오지마을이었다”고 말했다. 김재식(71) 씨는 “내성천 연안 피난처 12실이란 멱실, 곰실, 호구실(옛마을, 합실·읍실·간실·새실·물레실) 등을 말한다”면서 “모두 문수면·장수면에 있는 마을로 오랜 역사를 가진 집성촌들”이라고 말했다.

단양우씨 열녀각

경주김씨 입향 내력
멱실마을 김칠성(79,28세손) 노인회장과 세보를 펴 놓고 입향 내력을 살펴봤다. 멱실의 경주김씨는 계성군파로 시조 알지(閼智)下, 신라 경순왕(敬順王)下, 중시조 인관(仁琯,1세)下, 고려 충신 자수(自粹,9세)下, 파조 임(任,鷄城君,12세)下, 입향조 태경(太慶,20세)下, 그의 아들 한태(漢台,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와 한홍(漢洪,성균관진사)의 후손들이다. 김칠성 회장은 “상촌공(桑村公) 휘 자수(自粹,1351-1413) 선조는 1374년(공민왕23) 문과급제하여 충청도관찰사를 지내셨다. 조선개국 후 이성계의 출사 요청을 받고 고향인 안동에서 개경으로 가던 중 경기도 광주에 이르러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고려충신”이라고 했다. 또 “계령군파 파조이신 임(任) 선조는 성종 11년(1480) 문과에 급제한 후 양주목사를 지내셨으며, 중종 2년(1507) 정국공신이 되어 계성군에 책봉되셨다”고 했다. 김 회장은 또 “입향조 태경(1684년생) 선조는 충남 대산면에서 태어나 절충장군(折衝將軍,정삼품)을 지낸 무관이셨다. 한양에서 벼슬을 마치고 1730년경(40대 후반으로 추정) 후손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피난처를 찾아 내성천 일원을 탐색하던 중 산수 수려한 이곳에 정착하셨다”고 말했다.

멱실교회

일찍이 교회를 세운마을
멱실은 내성천 12실 중 교회가 우뚝한 마을이다. 오진문(권사) 할머니는 기자를 보고 “교회 다니시라”고 권했다. 임복녀(91) 할머니는 “김칠성 노인회장님은 멱실교회 출신으로 목사가 되어 영주, 예천, 포항 등지에서 봉직하다가 퇴직 후 고향에 돌아와 마을을 위해 봉사활동을 많이 하신다”며 “마을 사람들은 모두 ‘목사님’이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김칠성 목사는 “멱실교회는 1931년 영주중앙교회 신도이신 김완식(연세대 김찬국교수의 조부) 선생께서 개척한 교회”라며 “당시 교회 내에 영문서숙을 설립하여 청년들에게 신학문 교육과 농촌계몽운동을 주도하셨다.

또 멱실 선조들의 교육열은 1947년 문수국민학교 조제분교를 멱실에 설립하기도 했다. 또한 6.25 때 불탄 교회를 김기수 목사가 복원하여 성경구락부를 창설 인재양성에 힘썼다. 멱실은 교회의 영향으로 목사 14명, 장로 5명을 배출하였으며, 초중고 교원과 대학교수 그리고 각계각층 지도자가 많이 나온 마을”이라고 말했다.

멱실 경로당

빨갱이와 싸운 멱실 청년들
1949년 6월 어느 날 저녁. 학가산에 근거지를 둔 빨갱이들이 어둠을 타고 마을에 숨어들었다. 김필분(90) 할머니는 “당시 마을 구장(이장)의 딸이 ‘빨갱이다!’라고 소리 쳤고, 김동정(金東鼎,당시 42세) 구장이 마당으로 뛰쳐나가는 순간 ‘탕! 탕!’ 총소리가 났다. 구장은 다리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들것을 만들어 메고 석탑-옹천을 거쳐 안동병원까지 갔으나 김 구장은 출혈이 심해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면서 “그리고 어느 날 빨갱이가 나타나자 동네 청년들이 잡아 묶어 보릿가리 속에 가두고 지서로 연락을 취하는 중 동조자가 풀어주는 바람에 도망치고 말았다”고 했다.

당시 빨갱이들이 골목으로 솔솔 기어 다니는 것을 봤다는 김옥녀(83) 할머니는 “음력 10월 어느 날 ‘보릿가리 사건’에 앙심을 품은 빨갱이들이 마을에 나타나 그 사건의 관련자로 김원석(57세) 씨를 지목하고 총으로 쏴 사망케 했다. 이로써 마을 사람 2명이 희생되고 마을이 많은 고초를 겪었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그해 가을 마을에 소개령이 내려졌고, 11월말 빨갱이들이 마을에 불을 질러 초가 13집과 교회가 불타 폐허가 됐다”면서 “다음해 6.25가 일어나자 마을 청년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모두 군에 자원입대하여 참전용사가 됐다. 안타깝게도 7명이 전사하고 1명 납치, 2명이 상이용사가 됐지만 후손들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멱실마을 사람들
김덕환 이장
김칠성 노인회장
오진문 할머니
임복녀 할머니
김필분 할머니
여남교 할머니
김옥녀 할머니
김재식 씨
김한식 노인회부회장
금용하 씨

멱실마을 사람들
기자가 마을에 갔을 때 김재식·김한식·금용하 씨는 보름날 윷놀이 준비에 분주했다. 초곡에서 20살 때 멱실로 시집 온 오진문(96) 할머니는 “신랑 따라 서울로 가서 딸·아들 낳고 행복하게 살았는데 6.25 무렵 어느 날 공산당이 나타나 당시 산업조합에 다니던 남편을 납치해 갔다. 그리고 남편은 영영 소식이 없었다. 그 후 어린 남매를 혼자 키웠고, 대학까지 시키느라 어렵고 험한 일 많이 했었다”고 했다. 마을 서쪽 산자락에 단양우씨 열녀각이 있다. 기문에 보면 「경주김씨 김동일(金東一)의 처 단양우씨(丹陽禹氏)는 1930년 17살에 결혼하였으나 출산을 못하고, 2년 뒤 남편이 병으로 죽으니 소상을 치룬 후 남편 무덤 옆 소나무에 목을 매 남편 곁으로 갔다. 지역 유림은 그의 절개를 기리고 후세에 교훈으로 남기기 위해 열녀각을 세운다」라고 적었다.

이 마을 금용하(69) 씨는 “이 열녀각은 후세들에게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세워졌다”며 “멱실에는 효자, 충신, 열녀가 많이 태어난 유학의 마을”이라고 말했다.

정월보름날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윷을 놀았다. 신임 이장으로 선출된 김덕환 이장이 영양떡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마을 사람들이 정성을 모아 큰상을 차렸다. 여남교(87) 할머니는 “김칠성 노인회장님과 김덕환 이장님이 마을을 잘 이끌어 주셔서 늘 화기애애한 마을”이라면서 “지난 겨울동안 마을 부녀회에서 점심과 저녁을 해줘서 고마웠다. 지금은 황희수 목사님 사모님께서 노인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많이 하신다”고 말했다.

황희수 할머니

황희수(80) 사모님은 “목사님께서 정년퇴임 후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을 때 그렇게 좋아하셨다”며 “지금은 교회와 마을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제일 행복해 하신다”고 말했다. 오후 회관에서 나와 김 노인회장과 입향조 태경의 묘와 열녀각을 둘러 봤다.

김 회장은 “해마다 추석 전 토요일 날 후손 100여명이 모여 벌초와 문회(門會)를 연다”면서 “멱실 출신들은 어느 마을보다 애국심이 강하고 애향심이 두텁다”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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