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이사람]아들딸 거름이 되는 남일장씨

추운 겨울 아침에 해가 뜨면 거리로 나간다. 밤 10시까지 노천에서 떨며 과실을 판다. 병든 몸으로 길거리를 전전하며 과일행상으로 자식들을 공부시키는 부정(父情)이 있어 주위를 뜨겁게 하고 있다.

영주시 가흥1동 주공임대아파트 105동1205호 남일장씨(南一將·47). 남씨는 영주시 문수면이 고향으로 영광중고교를 나와 서울권역의 대학에 진입, 1년을 다니다가 가정형편으로 중퇴했다. 군에 입대, 1988년 제대 후 1990년 코레일(당시 영주지방철도청) 역무직에 합격, 교육중 병이 발견됐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선천 강직성척추염으로 근무를 해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아내가 원하던 직장은 끝났다. 직장이 문제가 아니라 그 병은 불치의 병으로 병고에 시달리며 사는 고달픈 인생을 살아야 했다.

‘또 한해도 저물어 갑니다.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너무 힘듭니다. 요즘은 경기가 안 좋은지 영 안 팔리네요. 과일 장사를 시작한지 엊그제 같은데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거리로 나와 과실을 판다. 남씨가 파는 과실 주종은 사과, 배, 밀감, 감, 딸기, 포도, 수박, 참외 등을 판다. 봄여름에는 딸기, 수박, 참외, 가을에는 포도 복숭아, 겨울에는 사과, 감, 밀감을 판다.

지정장소에 천막을 치고 기다리고 있으면 잘 팔리는 날도 있지만 안 팔리는 날도 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다. 다 팔려야 이문이 남는데 안 팔리는 날은 생물이란 썩고 변하고 버려야 하는 것도 있기 때문에 남는 것이 없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시내 중심가인 신한은행(구 조흥은행) 옆에서 팔았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노점상을 못하게 단속을 했다. 결국 그 자리를 못 지키고 이리저리 떠돌다가 정착한 곳이 영주축협 원당로지점 앞 영동선 철길 옆 원당로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통행에 방해가 된다고 못하게 했다. 여기서도 못하게 하면 우리 식구가 먹고살 것을 주던지 나라에서 먹여 살리라고 단속원에게 죽기 살기로 달려들기도 했다.

단속원인들 직무수행에 충실 할 뿐, 그 사람인들 무슨 죄가 있는가. 내 분을 못 이기는 분풀이를 하고 나니 내가 내 스스로가 미워 이동화장실로 아 들어가 복받쳐오는 서러움을 소리 내어 실컷 울고 나니 마음이 한결 후련해지더라고 멋쩍게 웃는다.

시당국에서는 노점상 단속을 하는 것이 맞다. 지난 5월 손님자전거에 과실상자를 실어주던 중 도로를 지나가던 승용차에 치어 5개월간 입원을 하는 등 반죽음에서 살아났다.

그렇게 사는 그의 고된 삶은 그에게 부여된 어린 자녀들을 위한 꿈나무 때문이다. 어떤 고생도 불사한다. 오직 일념은 자식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어느 세월에 그렇게 자랐는지 모른다.

영광여고를 나온 장녀 남수정양(23)은 서울교대 4학년으로 국가임용고시1차 시험에 합격했으며 곧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 난다. 아들 남민우군(21)은 상명대 영어학과 2년 재학 중으로 2년 후면 졸업한다. 이제 그의 고생도 얼마 남지 않았다.

국가는 날로 경제성장하지만 실업자와 생계형 빈곤층이 늘어나면서 자꾸 노점 과일상도 늘어난다. ‘먼 원당로까지 찾아와 자식들의 교육을 시킬 수 있도록 과실을 팔아주는 지인들과 영주 시민들께 고개 숙여 깊이 감사드린다’고 했다.

할 말이 없다던 그는 돌아서는 나를 다시 불러 머뭇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하고 싶은 말은 아들딸이 다른 부모처럼 학비를 넉넉히 대주지 못 하는 데도 잘 자라주는 것이 고맙고, 못난 아버지가 되어 부끄럽고, 끝으로 자기의 병수발로 평생 고생만 시키는 못난 남편을 만나 온갖 험한 일 마다하지 않고 다 하는 아내 안정금씨(46· 영주 삼성생명 근무)에게 ‘죽어서도 그 은혜를 다 못 갚는 아내는 날개 없는 천사’라고 가슴이 아픈 듯 가슴을 움켜잡고 눈시울을 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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