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안 최상호(본지논설위원, 시조시인)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우스개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신이 세상을 창조하면서 당나귀, 개, 원숭이, 인간에게 똑같이 30년의 수명을 주었단다. 그런데 당나귀, 개, 원숭이는 30년이 너무 길다고 하며 수명을 줄여달라고 애원했단다. 그래서 신은 당나귀는 12년, 개는 18년, 원숭이는 20년으로 각각 수명을 줄여줬단다. 반면 30년이 너무 짧다고 생각한 인간은 수명을 늘려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자비로운 신은 당나귀, 개, 원숭이에게 줄여준 시간을 전부 인간에게 몰아서 주었단다. 그 결과 인간은 70세까지 살게 됐지만 처음 30년만 인간처럼 살고, 이후 18년은 당나귀, 다음 12년은 개, 마지막 10년은 원숭이처럼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됐단다. ‘헨젤과 그레텔’로 유명한 19세기 독일 작가 그림 형제가 쓴 우화집에 나오는 이야기다. 십장생을 내세워 장수를 꿈꾸는 인간들에게 현실적인 수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약간은 우습겠지만, 사는 동안에 행복하게 지내려는 욕망을 탓할 수는 없으리라.

청년백수 100만 시대라고 하는 우리나라와는 좀 다른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몇 년 전 미국과 독일 학자들이 2만1천명의 영국인을 대상으로 삶에 대한 연령대별 만족도를 조사했다고 한다. 현재 느끼는 만족감을 1점(완전 불만)부터 7점(완전 만족)까지 점수로 표시하도록 했더니 40대의 만족도가 가장 낮은 것으로 나왔다고 한다. 삶에 대한 근심과 걱정이 상대적으로 적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는 20대 초 때는 비교적 만족도가 높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계속 낮아져 46세 때 바닥을 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후 다시 높아지기 시작해 74세 때 만족감이 절정에 이르렀다고 한다. 일상의 부담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삶을 즐기며 만족할 줄 아는 여유를 찾는 시기가 70대 중반 때라는 것이다. 반면에 삶에 대한 만족도가 가장 낮은 40대는 무거운 짐을 지고도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당나귀의 삶을 사는 시기가 아니겠는가.

애당초 인간은 30년 동안 꿈을 좇아 산다. 장밋빛 꿈에 젖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직업을 통해 자아를 실현해 간다. 그러나 늘어가는 교육비, 생활비 걱정으로 꿈은 현상 유지에도 급급하게 되는데 그 바닥이 바로 40대 후반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40대를 규정하는 두 단어는 부담과 불안이 아닐까 한다. 주택비 부담에 자녀 학비와 사교육비 부담에 허리가 휜다. 집값 폭등으로 가장 고통을 겪는 것도 40대다. ‘하우스푸어'의 위험에 가장 많이 노출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후 준비도 변변히 해놓은 게 없는데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 소리를 들으며 언제 퇴출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회복지가 부상되면서 정치적 포퓰리즘으로 인한 조세부담이 3040세대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80학번 세대는 신군부에 맞서 민주화를 이루어냈다는 자부심에 충만한 세대임에도,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며 양극화의 문제를 피부로 느끼고 있는 지극히 불안정한 세대가 아닐까 싶다.

지난 총선 때 40대 유권자 수는 전체 유권자의 22%를 차지하여 전체 연령대 중 가장 많은 숫자로 봐야 했으나, 지난 대선에는 50대의 표심이 대통령을 선택했다고 한다. 2030세대가 선거판의 주요 변수인 것도 사실이지만, 4050세대를 잡아야 대권을 잡는다는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지난해에 불거진 여론조사에서는 40대의 표심이 유력후보들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고 해서 불혹(不惑)이 아니라 갈대라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우리나라 인구의 정상분포는 청장년층이 두터운 게 현실이다. 그런데 전 세계의 인구 분포가 역삼각형으로 바뀌는 중이라니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각국의 인구정책은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받게 되었다.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은 “20대 때 진보가 아니면 심장이 없는 것이고, 40대 때 보수가 아니면 뇌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지만 우리나라의 4050세대에게 뇌를 기대하기에는 그들이 가진 부담과 불안이 너무 컸다. 그래서 진보와 보수의 세력다툼에서 진보가 밀리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 한반도 평화시대를 꿈꾸는 현재 우리나라 국민들은 세대간 차이가 그리 크고 높지 않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류현진 선수나 영국 리그에서의 손흥민 선수 같은 이들로 향하는 함성, 광장에서의 뜨거운 촛불집회, 모든 언론매체의 한결같은 우국충정에 국민 모두가 뜨겁다. 사상최초의 한일 경제전쟁, 지소미아 파기 같은 국제외교 문제가 심각한데도 불구하고 정치권은 말들이 많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같은 감정으로 보고 듣는다. 다양한 국민감정들이 소용돌이치는 선거판에서 세대간의 표심 역시나 다양하게 표출될 것이다. 그러나 통일된 조국과 골고루 잘 사는 복지국가 건설을 두고 누가 다른 뜻을 품을 수 있을 것인가. 지천명 이후의 세대들에게는 후세를 돌보는 일에 목숨 걸어야 할 개의 운명과 쌓은 경륜을 나타내어야 할 원숭이의 숙명이 기다릴 뿐이다. 사람의 목숨은 수명이 다하는 마지막 그날 까지 자기만이 아닌 공동체의 영역 안에서 자기역할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야 자기들이 정권을 잡아야만 나라가 발전하고 국민이 잘 살게 될 거라고 선동하겠지만, 사실 누가 집권하든지 간에 나라는 공무원들과 국민들의 상호협력의 분위기 때문에 굴러가는 것이다. 정치인의 비전이 국민감정에 얼추 맞추어지면 희생과 봉사, 책임과 의무가 국민의 언행을 조심스럽게 이끌 것이고, 결국은 꿈 너머 꿈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것이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세대간의 생각 차이를 좁히는 게 아니라 그네들이 공통되게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를 꿰뚫어보는 지혜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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