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창수(전 영주문화원 이사)

백여 년 전만해도 풍기 사람들이 <풍기는 작은 서울>이라 했고, 또 <작은 평안도>라고도 했다. 이는 풍기라는 곳이 마치 서울처럼 팔도사람들이 골고루 모여 사는 고장이란 뜻도 있고, 또 그 중에 우거(寓居)민으로서는 평안도 사람이 가장 많다고 해서 생긴 말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농업을 위주로, 대대로 한 고장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오던 우리민족은 왜정 때까지만 해도 인구의 유동이 매우 적은 편이어서, 유수한 도시를 제외하고 어느 고장이나 대대로 살던 곳에서 살아왔다. 구한말 이래로 혹 생계를 위해서, 혹은 남다른 뜻을 품고 해외로 이주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으나, 그것은 어쩌다가 사정에 의하여 혹시 일어나는 일들이었고, 보통 이사를 간다고 하면, 멀어야 백리 안팎일 정도였고, 타 도나 먼 타관으로 이동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지만, 풍기라는 곳은 경우가 달랐다.

멀리 평안도, 함경도, 제주도에서 까지 풍기로 이사를 오고, 그 중에는 평안도 사람이 제일 많았고 다음이 황해도였다. 그러면, 풍기가 이동인구의 구심점이 된 까닭이 무엇일까? 그것은 곧 정감록(鄭鑑錄)에 이른바 십승지지(十勝之地)의 첫손으로 꼽히는 길지(吉地)이기 때문이었다. 장차 끔찍한 변란의 시기가 닥쳐오리란 것을 예언한 정감록에 가장 무서운 재변(災變)인 삼재(병란, 흉년, 염병)를 피할 수 있는 안전한 고장이라고 하여 국내에서 열 군데를 들었는데, 그 중에서 첫째로 꼽힌 데가 풍기라는 것이다.

세상이 몹시 뒤숭숭하여 인심이 불안했던 구한말에서 나라가 쓰러지는 경술국치(庚戌國恥), 기미년 3.1 만세운동 무렵을 거쳐 8. 15광복 전후에 이르기까지 각처에서 산발적으로 모여들었으며, 그 중에서도 평안도, 황해도 사람들이 많은 수효를 차지했음은 정감록 등 유서에 <평안, 황해도는 다시 오랑캐 땅이 된다. 평안, 황해도는 사람 그림자 조차 없어진다.>라고 하니 평안도, 황해도는 사람이 살아남지 못할 지역이라는 무시무시한 예언이 있는데다가, 경술국치 이후에 만주 등 대륙 일대에서 활약하던 독립운동단체들이 가까운 서북지방에 드나들면서 유산(有産)층들을 상대로 독립자금을 거두었는데, 거기에 불응하면 독립단들로부터 해를 입게 되고 독립자금을 바치고 나면, 왜경(倭警)에게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 했으니, 당시 그 지대에는 독립 단원들이 지나가고 나면, 이어서 왜경이 들이닥치고, 왜경이 지나가고 나면, 다시 독립단원이 들이닥치고........ 이래서 비교적 살림이 넉넉한 층으로는 편한 잠을 이룰 수가 없을 만큼, 항상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 했기에 고향을 버리고 남쪽으로 옮기는 이들이 많게 되었고, 또 옮길 바에야 십승지(十勝地)에 첫째라는 풍기를 자연스럽게 선택한 현상이기도 했다.

십승지는 정감록에 등장하는 지명으로, 풍기의 금계촌, 봉화의 춘양, 보은 속리산, 운봉의 두류산, 예천의 금당동, 충남 공주의 유구와 마곡, 영월의 정동상류, 무주의 무풍동, 부안의 변산, 성주의 만수동이다. 우리나라 참서(讖書)의 주종(主宗)이 되고 있는 정감록은 정감(鄭鑑)과 이심(李沁)이라는 두 분이 팔도의 기승처(奇勝處)를 유람하는 길에 금강산 비로봉에 올라, 산세를 논하여 왕조의 변천이며 생민(生民)의 존망을 예언, 장차 조선왕조가 망한 뒤 계룡산 아래를 도읍으로 정(鄭)씨 왕조가 들어서게 되는 과정에서 전율(戰慄. 무섭고 두려움)할 만큼 끔찍한 재변이 닥칠 난세를 당하여 목숨을 보전할만한 곳과 방도에 대하여 문답한 예언서이다. 지금 전해오는 정감록은 무학, 토정, 남사고 등의 비결을 모아 엮은 것으로 이본(異本)이 많다고 하니 참고 바란다.

<참고: 영주영풍향토지,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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