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235] 풍기읍 백신1리 새터(新基)

1850년경 마을 형성, 1977년 새마을 선도마을
소백산의 정기를 받아 훌륭한 인재 많이 배출

백신1리 전경
새터마을 사람들

풍기읍 백신1리 가는 길
백신1리 새터 마을은 풍기에서 죽령·창락 방향에 있다. 백리교차로-백동교차로를 지나 산모롱이를 하나 돌아 서면 우측 방향 산자락에 자리 잡은 마을이 새터(新基)다. 도로변에 풍기농협 백신지점이 있고, 그 200m 안쪽에 마을이 있다.
지난달 25일 새터에 갔다. 이날 이원태 이장, 박달대 노인회장, 김용해 씨, 유호종 새마을지도자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새마을길

역사 속의 새터(新基)
백신1리 지역은 조선시대 때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 창락면(昌樂面) 관촌리(館村里)에 속해 있었다. 당시 창락면이 풍기군 경계를 넘어(越境地) 순흥도호부에 속하게 된 것은 풍기군수보다 품계가 높은 순흥도호부사가 창락역과 죽령을 관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1457년(세조3년) 금성대군 거사로 순흥부가 폐부되어 풍기군에 속했다가 1683년(숙종9년) 다시 순흥부로 회복됐다.
조선 말 1896년(고종33년) 행정구역 개편 때 순흥부가 순흥군으로 격하되고, 순흥부에 속해 있던 창락면이 풍기군으로 이관됐다. 이 때 창락면 신기동(新基洞)으로 정식 행정구역이 되어 역사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그러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풍기군, 순흥군, 영천군이 영주군으로 통합되고, 풍기군 창락면을 영주군 풍기면에 편입시켰다.
이 때 백수동의 백(白)자와 신기동의 신(新)자를 조합하여 ‘백신동(白新洞)’이라 했다. 통합된 백신동은 신기동은 백신1리, 백수동은 백신2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명 유래
조선시대 때 백신리 지역은 순흥부 창락면 관촌리(館村里)에 속했다고 앞서 말했다. ‘관촌리’란 지명은 영남북부에서 가장 큰 역(驛)이 이 마을에 있어서 얻은 이름이다.
당시 창락역에는 종6품 찰방이 관리하는 역(驛)이라 하여 ‘찰방역(察訪驛)’이라고도 했다. 당시 창락역에는 찰방(察訪) 1명, 역리(驛吏) 23명, 지인(知印) 18명, 사령(使令) 1명, 역노(驛奴) 21명, 역비(驛婢) 11명이 있었고(합75명), 대마 2필, 중마 5필, 짐마 9필이 있었다고 한다.
백신1리는 조선말(1896) 행정구역 개편 때 신기동(新基洞)이란 공식 동명을 갖게 됐다.
예전에 선비들이 마을 이름을 지을 때 조선 후기(1800-1900) 무렵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새 신(新)자와 터 기(基)자를 써 ‘신기(新基)’라 했는데 ‘새터’라 부르기도 했다.

새터 성황당

새터 마을의 형성
풍기읍지에 보면 「1910년경 안동권씨, 안동김씨, 흥해배씨 등 삼성이 이곳에 정착하여 새 터전을 개척했다」라고 했다.
이 마을 김용해(78.김해김.삼현공파.69대손) 씨는 “저의 증조부님께서 을주군 웅천면에 사셨는데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곳을 찾아 (고조부님을 모시고) 풍기땅으로 오셨다는 이야기를 조부님으로부터 들었다”며 “확실한 입향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족보상 생몰(生歿) 연대를 따져보니 1850년경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 마을 원로 임병삼(88,나주임씨) 어르신은 “선대는 원래 강계에 사셨는데 지금으로부터 180년 전쯤 증조부님께서 풍기로 이거하셨다는 이야기를 선친께 들었다”면서 “그 때가 아마도 1840년경인 것으로 짐작 된다”고 말했다.
권기일(81) 어르신은 “마을 원로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1850년을 전후해 한 집 두 집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여 차차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여진다”며 “그러다가 조선말(1896) 행정구역 개편 때는 이미 상당한 마을로 인정받아 ‘신기동’이 됐다. 그러니까 새터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850년경으로 보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취락구조개선주택

새마을운동 선진마을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1970년초부터 새마을운동이 불붙기 시작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면 넓은 골목에 새마을시대 때 건축된 주택이 여러 채 보인다.
새마을운동 당시 마을 동장(1969-79)을 지낸 박달대 노인회장은 “새마을운동이 전국으로 확산 될 때 우리 마을도 모두 발 벗고 나섰다. 호당 부역(공익봉사)을 68개나 할 정도로 적극 참여했다”면서 “1977년 취락구조개선사업이 영주군에서 1호로 선정되어 원 건물 23동과 부속건물 32동, 담장 2,600m, 하수도 1,400m, 공공시설 4개소, 소득증대 사업 1개소 등 마을 현대화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쳐 교육부장관 표창을 받았다”고 말했다.
본 사업을 기념하기 위해 동수나무 아래 기념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동장 박달대, 추진위원장 김영진, 어머니회장 이재남, 새마을지도자 안정원, 반장 임병삼」이라고 새겼다.

느티나무 숲
동샘과 향나무
새터마을 쉼터

새터 마을의 미풍양속
이원태 이장은 “예로부터 새터는 복조리형 터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곳에 들어와 사는 사람들마다 부자가 된다는 전설이 전해온다”며 “또 마을 한가운데에는 마을이 개척될 당시 삼성(三姓)의 대표자들이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동수목이 한 그루 있고, 세월이 흐른 후 입향조의 후손들이 70여 년 전 동구에 느티나무 4그루를 심어 후손들이 살아갈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셨다”고 말했다. 유호종 새마을지도자는 “일제 때 새터에 입강(入江)이라는 일본 사람이 살았는데 마을 사람들과 품앗이를 하며 농사를 지었고, 사냥에서 얻은 꿩과 토끼 등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면서 “해방이 되어 일본으로 돌아갈 때는 전 재산을 모두 마을에 기증하고 떠나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그를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을 가운데 샘이 있다기에 이원태 이장과 그 곳에 갔다. 마을에서 샘을 잘 보존해 샘 주변에 있는 향나무와 샘이 예전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이장은 “선조들이 남긴 것 중 온전히 보존된 게 동수나무와 샘 밖에 없다”며 “선대 어르신들께서 ‘샘이 있어 마을을 이루었으니 샘을 잘 보존하라’는 말씀이 계셨다”고 말했다. 샘에서 북편으로 200m쯤 올라가면 철둑 아래 서낭당이 있다. 임병삼 어르신은 서낭당에 대해 “마을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서낭제를 매년 정월대보름날 자시(子時)에 지냈다”며 “우리 마을 동제는 먼저 서낭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다시 동수나무로 이동하여 제를 올린다. 이렇게 두 곳에 동신을 모시는 풍습이 다른 마을과 조금 다르다”고 말했다. 박달대 노인회장은 “마을 앞 느티나무 4그루는 선조들이 후손들을 위해 심으신 것”이라면 “여름이면 숲이 무성하여 마을을 아름답게 할 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많이 쉬다가는 쉼터”라고 말했다.

백신1리 마을회관
새터 경로당

새터마을 사람들
새터 마을은 70여 호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단일 마을이다. 주변 산세가 아늑하여 복조리 지형이라는 예쁜 이름도 얻었다. 이 마을은 일찍이 1971년에 건립된 마을회관이 있었다고 하며 한 때 구판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40여년이 지난 후 2007년 마을회관을 새로 지었다. 회관 앞에 있는 기념비 머릿글에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은 마르지 않는다. 추진위원장 이장 권응열, 노인회장 권기하, 지도자 이기형, 부녀회장 이경희 2007.11.28. 준공」이라고 새겨져 있다.

김유전(87) 할머니는 “예전에 모두 먹고 살기 힘들었지만 아이들 공부시키는 일에는 온갖 정성을 다했다”며 “우리마을 김용해 씨 아들(김정곤,53)은 서울대 출신으로 한국일보(기자) 사회부장에 올랐고, 막내 아들(김영곤,45)은 고려대를 졸업하고 영남대로스쿨 출신 변호사다. 그 외에도 집집마다 아들딸들이 열심히 공부하여 각계각층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희순(85) 할머니는 “65년 전 20살 때 안정 대평에서 새터로 시집왔다”며 “당시는 초가집만 옹기종기 있었는데 새마을운동 때 길을 넓히고 담쌓고 기와나 슬레트집으로 개량했다”고 말했다.

김순자(77) 씨는 “예천 효자면(상리) 산골에 살다가 기차를 볼 수 있는 새터로 시집왔다”면서 “어르신들로부터 듣기로 새터는 풍수해가 없어 해마다 풍년이고, 교통 좋고 풍광이 좋아 살기 좋은 마을이라”고 말했다.

류도순(85) 할머니는 “20살 때 안동 풍천 친정집 마당에서 구식 결혼식을 하고 버스타고 가마타고 새터로 시집왔다”며 “새터는 훌륭한 이장·지도자들이 많이 나와 마을을 발전시키고 부자마을로 만들었다. 지금도 이원태 이장, 박달대 노인회장, 유호종 지도자, 부녀회장이 마을을 위해 많은 일을 한다. 참 고맙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이원태 이장
박달대 노인회장
김용해 씨
유호종 새마을지도자
임병삼 어르신
권기일 어르신
김유전 할머니
정희순 할머니
김순자 씨
류도순 할머니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