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소수서원 개념도(⑪강학당, 문성공묘)

한국의 서원은 대체로 16, 17세기에 지어진 서원들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을 비롯한 전국의 9개 서원이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기다리고 있다. 문화재청이 2015년 이들 9개 서원에 대해 세계유산 등재 신청을 했다가 여의치 않아 이듬해 자진 철회하였다. 이후 구역을 재조정하는 등 미비점을 보완하여 작년에 다시 신청했다. 다시 신청한 아홉 개 서원도 당연히 소수서원이 중심이 된다.

소수서원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47개 서원중의 하나” 라는 설명 정도로는 그 위상을 그려내기가 턱없이 부족하다.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이 이곳 순흥 출신 성리학자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해 사묘(祀廟)를 세웠다가 이듬해인 1543년 8월,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완성한 것이 이 서원의 시작이다. 하버드대학보다도 90여년 앞 선 고등교육기관으로 파악된다. ‘백운동’이라는 명칭이 중국 주희의 ‘백록동서원’을 표방한 이름이라고 하지만, 원래 숙수사(宿水寺)가 있었던 이곳 골짜기 이름이 백운동이어서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셈이라고나 할까? 뒤이어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李滉)이 서원을 널리 알리기 위해 조정에 사액(賜額)을 요청했고, 이에 명종이 ‘旣廢之學 紹而修之(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한다)’는 뜻을 담아 『紹修書院(소수서원)』이라는 친필 현판을 내림으로써 나라가 공인하는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된 것이다. 1550년 2월의 일이다. 이 같은 조처는 교육기관으로서의 위치를 공인받은 것,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위상이지만, 부수적으로 서적과 토지, 노비와 함께 면세·면역(免役)의 특권까지를 부여받음으로써 서원 운영에 커다란 활력을 주었다. 소수서원의 위치가 이다지 확고하게 되면서, 이후 전국에는 서원들이 다투어 들어서는 결과를 가져왔고, 또한 서원을 중심으로 조선후기 사림의 중요한 거점이 마련되게 된 것이다. 그런 중심에 소수서원이 당당히 서있는 것이다. 1963년 1월 21일, 정부 지정 사적 제55호는 그런 연유를 담고 있다.

서원 내에는 국보 제111호 안향초상(安珦肖像)을 비롯하여, 보물 제59호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 보물 제485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 보물 제717호 주세붕초상(周世鵬肖像), 보물 제1402호 문성공묘(文成公廟), 보물 제1403호 강학당(講學堂)이 있으며, 장서각(藏書閣)에는 141종 563책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었다. 그 이외 건물로는 일신재(日新齋)·직방재(直方齋)·영정각(影幀閣)·전사청(典祀廳)·지락재(至樂齋)·학구재(學求齋)·경렴정(景濂亭)과 탁연지(濯硯池) 등이 각각의 유서를 달고 있다.

소수서원은 최초의 서원답게 후대의 서원과는 달리 건물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배열되는 구조를 보이고 있다. 강학(講學)의 중심인 강학당을 동쪽에, 배향(配享)의 중심 공간인 사당(祠堂)을 서쪽에 배치하여 이른바 서쪽을 으뜸 삼는다는 전통의 이서위상(以西爲上)법을 따르고 있다. 사당 현판도 「문성공묘」라 하여 공자묘(孔子廟)나 종묘(宗廟)처럼 일반 사당보다는 한 단계 더 높은 격을 쓰고 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동학서묘(東學西廟)의 구조가 형성되었다. 기타 전각들도 어떤 특정의 중심축을 설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배치된 점이 특이하다고 하겠다. 보통의 경우 강당 앞뜰 좌우에 있어야할 동·서재(東·西齋)가 없고, 대신에 4개의 재실인 일신재, 직방재, 지락재, 학구재가 독립적으로 산재하면서 각각의 명찰을 달고 있다. 또한 누각이나 정문 같은 별도의 경계 건물이 없이 단지 경렴정이란 정자를 담장 밖으로 밀어내어 후대 서원의 누각이 지녔던 풍류를 대신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문이나 사당으로 들어서는 문이 일반적인 삼문(三門)의 형태가 아니라 외문으로 된 것도 다른 점이다. 그 밖에 장서각·전사청·고직사(庫直舍) 등은 뒤쪽으로 배치되어 있다.

소수서원은 서원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장대한 학자림을 거쳐야 한다. 무려 3~400년생 소나무 500여 그루가 뿜어내는 오케스트라 같은 장엄한 솔 향을 맡으며 서원 정문을 들어서게 된다는 말이다. 이 또한 전국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대단한 자연 경관이다. 예사스럽지 않은 금강송은 처음부터 유생들을 격려하기 위한 학자수(學者樹)로 인공 조림되었다고 한다. 군자의 표상인 소나무의 기상을 유생들이 배우라는 뜻으로 서원 건립 초기에 1천여 그루 심은 것이 500여 그루 살아남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일찍부터 학교 숲을 조성한 것이다. 오랜 소나무는 이미 등껍질이 6각형 거북등을 닮았다. 이른바 구송(龜松)이다.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참선비가 되라’는 의미로 ‘세한송(歲寒松)’이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권돈인은 순흥 유배시절 이 학자수를 그려 절친 추사(김정희)에게 보냈다. 뒤에 추사가 이 그림을 토대로 세한도를 완성해 제자 이상적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추사의 세한도(歲寒圖) 연유가 바로 소수서원 학자수라는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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