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서각(시인·문학박사)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소슬한 바람이 옷깃에 스미고 거리에 줄지어 선 가로수는 발 아래 낙엽을 떨군다. 낙엽을 밟으며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모습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누구는 먼 곳에 있는 이를 그리워할 것이고 누구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누군가를 그리워할 것이고 누구는 젊은 시절에 헤어진 첫사랑의 사람을 그리워할 것이다.

가을에 ‘시월의 마지막 밤’이라는 말을 저마다 입에 올리는 것은 그 노래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노래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을은 그 누군가를 그리워하게 한다.

계절마다 사람들이 갖는 느낌은 다르다. 봄이 무언가 이루어질 것 같은 설렘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그리움의 계절이다. 그리운 이는 만나면 좋고 만나지 못해도 그냥 그리워해서 좋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사람의 내면은 순수로 가득하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이의 내면을 생각해 보면 그와는 대조되는 풍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미움으로 혹은 시기로 혹은 좋지 못한 것들로 가득 찬 항아리보다 그리움으로 가득 찬 항아리가 보기에 아름답다.

항아리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지 못해도 아름다운 것이 담긴 항아리는 그 아름다움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리움은 사람을 아름답게 한다.

들판의 곡식은 그 결실의 무게로 고개를 숙이고 나무들은 성장의 욕망을 놓아버린 채 깊은 사색의 색깔로 숙연하다. 가을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봄과 여름에 열심히 그리고 숨 가쁘게 살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지나간 시간을 천천히 되돌아본다.

그래서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기도 하다. 내가 걸어온 길이 바른 길이었나. 걸어오면서 누군가를 아프게 하지는 않았나. 지금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이 허된 길은 아닌가.

가을은 사람으로 하여금 반성하게 한다. 다른 동물들은 생명을 유지하고 종족을 보존하는 일에 일생을 바친다.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 반성할 줄 아는 존재다.

어차피 사람은 불완전한 피조물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오류가 없는 삶을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스스로를 반성할 줄 아는 존재이기에 스스로 아름다울 수 있다.

깊어가는 가을, 등불을 가까이 하고 지금은 가물가물 멀어서 희미한 옛날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다. 시간 여행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만나기도 한다. 웬 아이가 하나 울고 있다.

여기 세파에 시달리고 세속의 먼지로 남루해진 나이 든 사람 하나, 티 없이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바라보며 긴 사색과 그리움의 시간을 갖는다. 가을엔 그리워하는 이를 그리워하자. 그리워하고 사색하는 당신은 스스로 이름다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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