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141]가흥1동 목골

목골마을 전경

뚜껍바위 전설, 목골 못(池)과 목골 서당
이환공(履煥公)후손, 글로벌 인재 쏟아져

가흥1동 목골 가는 길

목골은 서천 야외수영장 문정폭포 뒤 산기슭에 있는 마을이다. 신영주 남부육거리에서 현대아파트 방향 비달고개를 넘으면 한정교가 보인다. 한정교를 건너자마자 2시 방향으로 보이는 마을이 목골(牧谷)이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 ‘목골’ 표석이 있고, 150m 가량 들어가면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지난 4-5일 목골에 갔다. 마을 앞 정자에서 송영익 전 야성건여회장, 송인걸 어르신, 이옥석 할머니, 송홍건 가흥1동 바르게살기위원장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야성송씨 입향 내력과 목골의 전설을 듣고 왔다.

마을표석

역사 속의 목골

우리 영주는 1413년(태종 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영천군(榮川郡)이 됐다. 목골 지역은 조선 중기 무렵 행정구역을 방리(坊里)로 구분할 때 가흥리(可興里) 초곡방(草谷坊.푸실)이라 부르다가 영조 이후 면동(面洞)으로 바뀌면서 가흥면 초곡동에 속했다.

조선 후기에 와서 1896년(고종33)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에서 13도제로 개편할 때 초곡동이 상초동(문전)과 하초동(한정)으로 분리되면서 가흥면 하초동에 편입됐다. 그 후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영주면 문정동(文亭洞)에 속했다가 1940년 영주읍 문정동, 1980년 영주시 가흥1동(14통)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 목골못 터

목골의 지명유래

영주시사에 보면 「약 500년 전 솟대재(현 휴천3동 사일근처)에 살던 송간(宋侃)이라는 선비가 이곳에 이주하여 서당을 세워 인재를 길렀다 하여 마을 이름을 목골(牧谷)이라 했다」고 되어있다. 또 구전에 의하면 예전에 말(馬)을 먹이는 목장(牧場)이 있어 목골이라 했다는 설과 마을에 못(池)이 있어 못골이라 부르다가 목골이 됐다는 등 여러 설이 전해진다.

이 마을 송홍건 씨는 “목골(牧谷)의 목(牧)자는 칠 목(牧)자다. 이는 ‘키우다’ ‘기르다’ ‘가르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인재양성’을 지향했던 선조님들의 소망이 지명에 잘 나타나 있다”고 말했다.

이환공 묘소

야성송씨 500년 세거지

목골은 야성송씨 영주 입향조 송석충(宋碩忠.1454~1524)의 셋째 아들 간(侃.1514-미상)이 마을을 개척하고 서당을 세워 인재양성에 힘쓴 마을이다.

이 마을 송영익(80.30세손) 어르신은 “목골 입향조이신 송간(宋侃) 선조는 내금위부사용(內禁衛副司勇) 벼슬을 지냈으며, 목골파 즉 내금위공파(內禁衛公派)의 파조(派祖)”라며 “그의 3자 되시는 송복유(宋福유.1544-1619) 선조는 용양위부호군을 지내셨고, 손자 송협(宋浹.1572-1613) 선조는 군자감 판관을 지내시고 증직으로 통정대부 사헌부집의에 오르셨다”고 했다.

송 어르신은 또 “야성송씨 내금위공파가 목골에 세거한지는 500여년이 됐다”며 “근대에 와서 건여 이환공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여 글로벌 인재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말했다.

한천서당

건여 이환 선생 후손들

목골 초입에 ‘야성송씨 휘 이환공 후손 세거지’라고 새긴 표석이 있다.

‘이환공이 누구시냐?’고 여쭈니 송영익 어르신은 “이환공(27세손)은 저의 증조부이시고, 아호가 건여(建汝)”라며 “야성송씨 목골문중은 대부분 건여공파(建汝公派)로서, 시조 맹(孟)자 영(英)자 下, 현령공(경산자공.14세.휘綸)파 下, 영주 입향조 눌재(訥齎) 송석충(宋碩忠.15세)의 3남 내금위공(휘侃.16세)파 下, 건여 이환(履煥.1843-1922) 할아버지(일명 앞산 할아버지)의 아들 4형제분 재원(在源), 재하(在河), 재락(在洛), 재영(在穎) 슬하 자손들”이라고 말했다.

송 어르신은 또 “이환공 후손들은 목골에서 6대째 내려오면서 100여명으로 번성했다”며 “산업화 이전에는 40여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15호 정도 남아있다”고 말했다. 이 마을 출신 송영우(76.영주동)씨는 “이환공 할아버지 후손들은 ‘학문을 중시하라’는 선조님의 높은 뜻을 받들고 열심히 공부하여 각계각층 지도자로 활동 중”이라고 말했다.

이환공 후손으로 대표적인 인사는 송홍우·송충선 씨가 NH농협은행 영주시지부장을 지냈고, 송광선 순천향대 법학부 교수, 송종국 한국과학기술정책연구원장, 서울대에서 공학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반도체업체 ㈜퀄컴에 근무하는 세계적인 과학자 송오석 박사, 송교석 서울 SUN치과 원장(박사), 서울대 약대 출신 송윤경 박사, 초중학교장 2명, 공인회계사 2명, 변리사 1명 등 글로벌 인재들이 다수 배출됐다.

야성건여회 총회

목골서당과 목골 못

목골은 야트막한 야산 아래 형님, 아우, 삼촌, 조카 집이 이웃하여 있다.

그리고 뚜껍바위 전설에 나오는 송석(宋石) 장사가 다녔다는 목골서당이 있고, 또 송 장사가 잉어를 잡아먹었다는 목골 못 또한 이 마을에 있다.

이 마을 이옥석(86) 할머니는 옛 못(池) 자리를 가리키며 “예전에 광승 살던 송석이란 소년이 너무 순진해서 학동들로부터 놀림을 받았지, 어느 날 꿈에 나타난 서당 훈장님 말씀 따라 잉어를 잡아 먹었더니 힘센 장사가 됐다”며 “나중에 송 장사가 억울하게 죽자, 갑옷 실은 용마가 못을 몇 바퀴 돌더니 갑옷을 광승 앞산 뚜껍바위에 넣은 후 뚜껑을 덮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이 마을 송인걸 어르신은 “마을 앞에 1천여평 가량 되는 목골 못이 있었는데 10여 년 전 메워버려 아쉽다”고 말했다. 전설에 나오는 목골서당이 지금도 마을 뒤에 있다. 서당 이름은 산천서당이다. 이 서당은 광해 3년(1611) 야성송씨 14세손 통훈대부좌리공신 영유현령을 지낸 현령공(縣令公.휘綸)의 별묘로 설립된 서당이라고 한다. (문화유적 지정 0926-26-029. 1963년)

동샘

 송영익의 시 ‘고향 하늘’

목골 느티나무 아래 아담한 정자가 있다. 정자 안에 ‘고향 하늘’이란 시가 눈길을 끈다. 이 시는 송영익 어르신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종중들을 위해 지은 시(詩)라고 한다.

「내 고향은 목골동네 아늑한 산골마을/앞산에 연분홍 진달래 곱게 피면/뒷산에서 뻐꾸기 노래 부르네/아부지 훅지 지고 논 갈러 가면/우리 어매 샘가에서 빨래를 하네/천방 둑에 버들피리 노래 부르고/동무들과 거랑에서 고기를 잡던/그 시절 아련히 떠오르거든/저 멀리 고향 하늘 바라보이소」

이 시를 지은 송영익 어르신 집은 정자 옆에 있다. 그는 이 노래에 곡을 붙여 기타로 연주하는 실버악사이기도 하다. 그의 집 거실에는 부인 장화순(78)씨가 쓴 ‘잡보장경(지혜로운 삶)’ 붓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부인은 뜨개질을 하고 실버악사는 기타로 ‘고향 하늘’을 연주했다. 그리고 부인께서 향이 진한 차 한 잔을 내오셨다.


목골 사람들

목골은 의좋은 (이환공 아들) 4형제가 살던 마을이다. 그 자리에 지금 후손들이 살고 있다.

이 마을 이옥석 할머니는 이야기할머니다. 선비가문의 교훈도 들려주시고, 뚜껍바위의 전설도 들려주셨다. 그리고 예전에 소 팔아 자녀 공부시킬 때 힘들었던 일들을 생생하게 들려주신다.

이웃 칭찬도 아끼지 않으셨다. 할머니는 “송홍건 조카는 목골건여회(종친회) 회장, 바르게살기회장, 새농민회경북도 부회장, 동네반장 등 매우 바쁘다”며 “조카는 남부초등 졸업 후 검정고시와 방송고를 나와 경북도립대 행정학과를 졸업한 만학도”라고 칭찬했다.

송홍건(65)씨는 제3대 야성송씨 목골건여회(cafe.daum.net/songgunyeo) 회장, 바르게살기 가흥1동위원장, 새농민회 영주시지부장 겸 경북도수석부회장이다. 부인 석대순(62)씨는 14통 부녀회장이다. 부부는 가시박제거, 경로당행사, 사랑의 연탄배달 등 여러 봉사활동에 앞장서고 있어 주변의 칭송이 자자하다.

송호익(81)·권영선(74) 부부는 몸은 조금 불편하지만 인정 많고 성실하다. 마을에서 몇 번 만나다보니 기자를 알아본다. 멀리서 보아도 반가움을 표한다. 송홍건 씨는 “두 분은 참 열심히 사신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종친들이 울력으로 도우며 살고 있다”며 “아들 4형제를 잘 키운 훌륭한 어버이”라고 말했다.

골목 안쪽 아담한 붉은 벽돌집이 송인걸(82)·강숙자(77) 부부집이다. 거실에 들어서니 분위기가 참 정갈하다. 부인께서 내주시는 차 한 잔을 마셨다. 송 씨는 “코레일에 근무하다 퇴직 후 가벼운 농사로 소일한다”고 했다.

이 마을에 살다가 지금은 시내에 살고 있는 강춘연(75) 씨는 “지금은 강변도로, 자동차전용도로 등으로 옛 모습이 많이 훼손됐지만 예전에는 배바위 앞에 깊은 물이 흐르고, 버드나무와 하얀모래가 어우러져 풍광이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가흥1동 목골마을 사람들>
 

송영익 어르신
장화순 씨
이옥석 할머니
송호익 어르신
권영선 씨
송인걸 어르신
강숙자 씨
송홍건 건여회장
석대순 부녀회장
강춘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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