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서비스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매체정보 바로가기
로그인 바로가기
기사검색 바로가기
전체서비스 바로가기
상단영역
최종편집 : 2024-04-26 22:43 (금)
홈
로그인
회원가입
facebook
kakaochanel
유튜브
naver band
RSS
기사검색
검색
전체메뉴 버튼
뉴스
전체기사
지역·정치
사회·행정
농업·경제
교육·문화
기획·특집
단체·인물
스포츠
영주TV
영주TV 제작영상
낭만에 대하여
잠깐! 1분 영주
브이로그 V-log
영주人, 영주IN
이사람
기획 인터뷰
출향인
너·꿈·응
영주희망알림방
우리동네 영주人터뷰
생생 영주살이 현장N
영주선비
역사속의 영주 인물
선비정신실천캠페인
선비의 삶과 흔적
영주 톺아보기
단체탐방
영주맛집
업체탐방
우리마을 탐방
길 따라 세월산책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
오피니언
김경미 시인의 시영아영
최대봉의 교양어 사전
김신중의 영주 톺아보기
시민칼럼
글나라 동심여행
독자기고
나도 기자다
시민기자
시민디카
보도자료실
소통마당
자유게시판
업무자료실
사진·만평
포토뉴스
김만용의 카툰
본문영역
업무자료실
닉네임
비밀번호
제목
내용
3. 무안박씨 영해(寧海波) 由來 우리 무안박씨는 뛰어난 조상들이 많았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직계조상으로는 고려시대 국학전주이신 중시조(諱進昇)를 비롯하여, 2세 諱 暹(字) 公은 거란을 물리친 공과 황제를 호종한 공으로 좌복야가 되셨고 능연각에 초상을 모셨으며, 3세 諱 元(字) 位(字) 公은 검교대장군이셨고, 4세 諱 甤(字) 公은 상장군, 5세 諱 成(字) 器(字) 公은 밀직부사, 6세 諱 浮(字) 公은 은청광록대부 밀직부사, 7세 諱 文(字) 晤(字) 公은 은청광록대부 상주국영동 평장사를 지내셨으며 면성군에 봉해졌다. 요즈음도 우리 박씨가 무안박씨 또는 면성박씨(綿城朴氏)라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8세 諱 允(字) 鏐(字) 公은 홍록대부 군부총랑, 9세 諱 天(字) 茂(字) 公은 통정대부 한성부 소윤을 지냈으며, 10세 諱 義(字) 龍(字) 公은 조선개국 공신이다. 이태조와 왕이 되기 전부터 친교가 있었으며 개국 시 많은 공을 세워 태조7년 개국정사공신의 록권을 받았고 병조, 호조, 형조판서를 거쳐 영중추 부사가 되었으나 영화를 탐하지 않고 무안으로 내려가 여생을 유유자적하며 보내셨다. 현재도 경기묘 옆에는 조선 정조조의 선비들이 공의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여 세운 병산서원이 있어 제향을 받고 있다. 11세 諱 鋼(字) 公은 가선대부 형조참판, 12세 諱 亨(字) 公은 봉렬대부 단양군수를 재냈으며 가선대부 형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수관 중시조의 13세손이신 諱 解(字) 公은 청렴결백하고 정의감이 강하여 그 벼슬이 定略將軍 진용교위 남행선전관에 이르렀으나 세조대왕이 조카이신 단종으로부터 왕위 찬탈하는 것을 보고 벼슬에 뜻을 버리고 여주로 퇴거하여 조용히 일생을 마치셨다. 우리 영해파조이신 副司直 贈 司僕寺正 諱之(字) 蒙(字) 公은 중시조 이후 14세손이시며, 諱 解(字) 公의 네 아드님 중 두 번째 아드님으로서 부모님을 여의시고 백부이신 평강공이 영덕 현령으로 부임할 때에 종사관으로 수행하셨다가 영해와 인연을 맺어 터를 잡고 세거하신 후 대대로 자손이 번창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충신열사를 많이 배출하여 영남의 호족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고 오늘에 이르렀으며 무안박씨 영해파는 모두 공의 자손들이며 공을 파조로 모신다. 특히 때는 연산조의 혼란기라 나라가 혼미한 정국으로 빠져들 무렵으로 공과 내외종간인 권신 임사홍이 동사(同任)할 것 권유했으나 준연히 사양하시고 척지(斥之)하셨다고 한다. 이 때에 사람들은 공의 성행이 고결하시고 부지(父志)를 계승하시어 학문에 힘쓰고 勢와 利를 멀리하셨다고 칭송했다고 한다. 공께서는 元基, 良基, 榮基, 昌基, 仁基 등 다섯 아드님을 두셨으며 후손들은 영덕, 언양, 선산, 석보, 봉화, 순흥, 영양, 동해, 군위, 영주, 안동, 영일, 영천, 경산, 상주, 경주, 청송, 대전 등지에 세거하고 있고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라 현재는 서울, 부산, 대구 등 대도시에 더 많이 유입되어 있는 실정이며 대략 세대수는 2,000세대이고 남자 인구수는 10,000여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우리 자손들은 입향조께서 1465년경에 이곳에 터를 잡으신 후 약 540여 년의 장구한 세월이 흘러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관계로 서로 만나도 한 핏줄임을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며 오늘을 사는 우리는 뿌리를 찾고 족의를 돈독히 하고 조상의 숭고한 뜻을 실천하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도표참조)
파일1
게시물 옵션
비밀글로 설정
자동등록방지
위로
전체메뉴
전체기사
뉴스
전체
지역·정치
사회·행정
농업·경제
교육·문화
기획·특집
단체·인물
스포츠
영주TV
전체
영주TV 제작영상
낭만에 대하여
잠깐! 1분 영주
브이로그 V-log
영주人, 영주IN
전체
이사람
기획 인터뷰
출향인
너·꿈·응
함께하는 세상
영주희망알림방
우리동네 영주人터뷰
생생 영주살이 현장N
영주선비
전체
역사속의 영주 인물
선비정신실천캠페인
선비의 삶과 흔적
영주 톺아보기
전체
단체탐방
영주맛집
업체탐방
우리마을 탐방
길 따라 세월산책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
영주 원도심 활성화 프로젝트
인물따라 세월산책
오피니언
전체
김신중의 영주 톺아보기
사설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김경미 시인의 시영아영
최대봉의 교양어 사전
권서각의 프리즘
시민칼럼
마을변호사의 생생 법률通
권자미 시인의 시읽기
글나라 동심여행
독자기고
최대봉의 문화읽기
영주사투리
사진·만평
전체
김만용의 세상 바로보기
나도 기자다
전체
시민기자
보도자료실
소통마당
본지알림
지방선거
전체메뉴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