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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박씨 영해파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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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등록일
2007-04-25 12:23:16
조회수
6476
3. 무안박씨 영해(寧海波) 由來

우리 무안박씨는 뛰어난 조상들이 많았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직계조상으로는 고려시대 국학전주이신 중시조(諱進昇)를 비롯하여, 2세 諱 暹(字) 公은 거란을 물리친 공과 황제를 호종한 공으로 좌복야가 되셨고 능연각에 초상을 모셨으며, 3세 諱 元(字) 位(字) 公은 검교대장군이셨고, 4세 諱 甤(字) 公은 상장군, 5세 諱 成(字) 器(字) 公은 밀직부사, 6세 諱 浮(字) 公은 은청광록대부 밀직부사, 7세 諱 文(字) 晤(字) 公은 은청광록대부 상주국영동 평장사를 지내셨으며 면성군에 봉해졌다.
요즈음도 우리 박씨가 무안박씨 또는 면성박씨(綿城朴氏)라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8세 諱 允(字) 鏐(字) 公은 홍록대부 군부총랑, 9세 諱 天(字) 茂(字) 公은 통정대부 한성부 소윤을 지냈으며, 10세 諱 義(字) 龍(字) 公은 조선개국 공신이다. 이태조와 왕이 되기 전부터 친교가 있었으며 개국 시 많은 공을 세워 태조7년 개국정사공신의 록권을 받았고 병조, 호조, 형조판서를 거쳐 영중추 부사가 되었으나 영화를 탐하지 않고 무안으로 내려가 여생을 유유자적하며 보내셨다. 현재도 경기묘 옆에는 조선 정조조의 선비들이 공의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여 세운 병산서원이 있어 제향을 받고 있다.
11세 諱 鋼(字) 公은 가선대부 형조참판, 12세 諱 亨(字) 公은 봉렬대부 단양군수를 재냈으며 가선대부 형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수관 중시조의 13세손이신 諱 解(字) 公은 청렴결백하고 정의감이 강하여 그 벼슬이 定略將軍 진용교위 남행선전관에 이르렀으나 세조대왕이 조카이신 단종으로부터 왕위 찬탈하는 것을 보고 벼슬에 뜻을 버리고 여주로 퇴거하여 조용히 일생을 마치셨다.
우리 영해파조이신 副司直 贈 司僕寺正 諱之(字) 蒙(字) 公은 중시조 이후 14세손이시며, 諱 解(字) 公의 네 아드님 중 두 번째 아드님으로서 부모님을 여의시고 백부이신 평강공이 영덕 현령으로 부임할 때에 종사관으로 수행하셨다가 영해와 인연을 맺어 터를 잡고 세거하신 후 대대로 자손이 번창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충신열사를 많이 배출하여 영남의 호족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고 오늘에 이르렀으며 무안박씨 영해파는 모두 공의 자손들이며 공을 파조로 모신다.
특히 때는 연산조의 혼란기라 나라가 혼미한 정국으로 빠져들 무렵으로 공과 내외종간인 권신 임사홍이 동사(同任)할 것 권유했으나 준연히 사양하시고 척지(斥之)하셨다고 한다. 이 때에 사람들은 공의 성행이 고결하시고 부지(父志)를 계승하시어 학문에 힘쓰고 勢와 利를 멀리하셨다고 칭송했다고 한다.
공께서는 元基, 良基, 榮基, 昌基, 仁基 등 다섯 아드님을 두셨으며 후손들은 영덕, 언양, 선산, 석보, 봉화, 순흥, 영양, 동해, 군위, 영주, 안동, 영일, 영천, 경산, 상주, 경주, 청송, 대전 등지에 세거하고 있고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라 현재는 서울, 부산, 대구 등 대도시에 더 많이 유입되어 있는 실정이며 대략 세대수는 2,000세대이고 남자 인구수는 10,000여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우리 자손들은 입향조께서 1465년경에 이곳에 터를 잡으신 후 약 540여 년의 장구한 세월이 흘러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관계로 서로 만나도 한 핏줄임을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며 오늘을 사는 우리는 뿌리를 찾고 족의를 돈독히 하고 조상의 숭고한 뜻을 실천하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도표참조)
작성일:2007-04-25 12:23:16 210.192.9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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