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많은 건축물이 풍수지리에 근거를 두고 세워졌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한국의 풍수지리의 기본개념은 땅의 형세를 인간의 길흉화복과 연관시키려는 자연관의 하나로, 풍수지리, 지술, 음양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린다. 풍수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줄임말로 길한 정기가 왕성한 장소에 터를 잡으면 그 자손들이 부귀영화를 누리지만, 반대로 흉한 기운이 있는 장소를 택하게 되면 불행을 겪게 된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그리고 풍수에서는 인간의 성쇠가 온전히 하늘과 땅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다. 이런 풍수지리설은 오랫동안 토착 신앙처럼 민간의 정신세계를 지배해 왔다. 오늘과 같은 첨단 과학 세상에서도 사후의 묘지뿐만 아니라 심지어 청와대, 도청 이전, 세종시 건설 때도 빠지지 않았던 이야기가 풍수지리설이다.
소수서원 일대에는 경관을 조망하는 장소로 ‘2山 4臺’가 있다고 한다. 그중 2산은 서원 뒷등을 받쳐주는 영귀봉(靈龜峰)과 서원 앞 시선을 끌어주는 앞산 연화봉(蓮花峯)을 이른다. 이중 영귀봉은 서북쪽으로 솟아오른 소수서원의 뒷동산을 말하는데, 현재의 충효교육관 뒤쪽 나지막한 봉우리이다. 신령스러운 거북이 물에 들어가려는 형국을 그렸으므로 영귀입수형(靈龜入水形) 명당이라고들 알려져 왔다. 한편으로는 엎드린 거북이 서원을 품고 있는 모양이므로 영귀포란형(靈龜抱卵形)이라고도 전 한다. 하여간 신령스러운 거북 모양이어서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예전에는 이 동산에 마을 사람들이 동제(洞祭)를 올리는 서낭당이 모셔져 있었을 만큼 신령스럽게 여기던 둔덕이다. 학자수 소나무들이 하나의 기운처럼 모여들어 유달리 눈길을 끄는 곳이기도 하다. 영귀봉의 신령스러움은 퍽이나 오래된 사연인 듯 봉우리 둘레에는 군데군데 아주 오랜 고분(古墳)이 늘어서 있다.
고려조 안축의 「죽계별곡」 시가에는 영귀봉이 지필봉(紙筆峰)으로 표현되어 있다. 영귀봉을 지필봉이라 한 것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근처에서는 눈에 잘 들어오는 오뚝한 봉우리이기 때문에 당시 이 지역 문인들의 마음을 다잡아주는 문필봉(文筆峯)으로 느끼게 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신령스러운 거북이 자신의 몸으로 따뜻한 체온을 만들어 소수서원을 끌어안은 모양이어서 영귀포란형이라고도 부르는 영귀봉 줄기는 충효교육관 뒤편의 봉긋한 둔덕 봉우리가 거북의 머리 부분이 되고, 문성공묘를 안고 있는 중허리가 거북의 배에 해당하며, 소나무 고목과 은행나무 보호수가 어우러진 꼬리 부분 돌무지 언덕이 소혼대(消魂臺)가 된다. 소혼대는 앙고대(仰高臺), 광풍대(光風臺), 취한대(翠寒臺)와 더불어 소수서원 4대로 꼽혀오던 곳이다.
소혼대는 중국 남조의 문인 강엄(江淹)의 시 「別賦(별부)」 중 [黯然消魂者 惟別而已(암연소혼자 유별이이) 슬퍼서 혼이 녹아나는 것은 오직 이별뿐이로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옛 소수서원 원생들이 서로 만나는 반가움을 나누거나 서원을 떠나는 사람들과의 석별의 정을 나누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소수서원으로 들어가는 아들을 처음 떼어 놓고 돌아서는 부모의 애틋함이, 배움의 도를 익혀 진정한 선비가 되겠다는 야무진 다짐이, 특히나 규정된 학업 과정을 마치고 더 넓은 세상으로 떠나는 동문수학 유생들을 언제 어디서 또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석별의 아쉬움을 함께 나누는 곳이 이곳 소혼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소혼대는 이곳에 올라 죽계를 내다보는 개울 경치 또한 일품이다. 소백산에서 영귀봉 안쪽으로 흘러든 죽계천이 연화봉을 만나 좁은 수구를 이루어 물을 가두는 효과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른바 득수처(得水處)이며, 곧 숙수(宿水)를 뜻하기도 한다. 옛 숙수사(宿水寺)를 떠올리는 그윽한 경관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기가 충만하고 깊은 산속처럼 산수가 잘 어울리는 경관을 두루 갖춘 곳이 바로 이곳의 계경(溪景)이다.
소수서원 창건자인 신재 주세붕도 이곳 경관이 중국 여산의 백록동서원에 못지않다며 ‘구름과 산, 언덕과 강물, 그리고 흰 구름이 항상 골짜기에 가득하므로 이곳을 백운동(白雲洞)으로 이름지었다’고 감회를 토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