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322] 뒷방 늙은이와 뒷방 어르신 <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 오피니언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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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확대경

배용호(전 영주교육장)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322] 뒷방 늙은이와 뒷방 어르신

2025. 11. 01 by 영주시민신문

축서사의 무여스님은 1940년생 김천 출신이다. 당시 잘 나가던 대기업 경리부 직장을 물리치고 스물여섯 창창한 나이에 오대산 상원사로 출가하여 20여 년간 동화사, 송광사, 해인사, 칠불사 등에서 참선 수행하다가 마흔일곱 중년에 쓰러져가는 작은 법당과 요사채만 겨우 붙어있던 봉화 축서사로 옮겨왔다.

이곳에서도 다른 곳들처럼 2~3년만 머물 요량으로 축서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그 스무 배가 훌쩍 넘는 40년 세월을 이곳 축서사에 머물러 있다. 허물어지고 쓰러져가는 법당 때문이었다. 훌훌 버리고 떠나기에는 너무나 안쓰러운 축서사의 형편이 무여스님을 무려 40년간 붙들어 세운 것이다. 그 결과 축서사는 오늘의 대가람으로 일구어졌고 번듯한 축서사로 옛 명성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15년 전쯤이었을까? 축서사로 무여스님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냥 가만히 서 있어도 영락없는 부처 얼굴이 그려지는 스님이 뒷방에서 나서자마자 대뜸, “높으신 교육자 어른들께서 ‘뒷방늙은이’에게 뭘 들을 게 있다고 이리 찾아 오셨슈?”로 법문을 시작했다. 스님의 법문은 30년 경력 이상 교육자들의 머리통을 강하게 내려치는 내용이었다. 스스로를 ‘뒷방늙은이’로 지칭하던 노 승려가 IT, BT, CT, NT 등 컴퓨터 관련 첨단 용어들이 그리도 여상스럽게 쏟아내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또 질문을 던진다.

“도쿄(東京)대학보다 한참 떨어지는 교토(京都)대학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더 많이 배출된 이유를 생각해보셨나요?”라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그때까지 노벨상 수상자가 교토대학에서 더 많이 배출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벙벙해 있는 우리에게 그는 “교토대학은 매 강의 시간 시작 전 10분 동안 참선(參禪)과 같은 정신집중 시간이 따로 있는데, 그런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서 사고의 폭을 넓혀준 결과가 아닐까요?”라고 친절하게 분석까지 해준다.

‘뒷방늙은이’란 공식적으로는 은퇴한 노인을 뜻하는 말이지만, 사적으로는 실권이 많던 사람이 가지고 있던 실권을 잃었을 때 자주 쓰이는 용어이다. 옛날 전통 사회에서도 ‘안방마님’은 집안의 실권과 권위를 상징하지만, 과거에는 뭔가 큰 역할을 했더래도 실권을 잃고 쓸모가 없어지면 ‘뒷방 신세’가 되었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뒷방늙은이’ 취급받기를 싫어한다. 자신의 경륜과 경험이 얼마든지 유용한데도 실권이 없어져 소위 폐기처분 직전의 퇴물 노인으로 비유되기 때문이다.

우리 생활 어디에든 뒷방은 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사회 어느 곳에서도…. 향교나 서원에도 뒷방이 있다. 지금은 향교나 서원 자체가 뒷방 신세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정신의 나라 조선을 책임질 만큼 대단했던 공간이 향교와 서원이었다. 그런 뒷방 향교의 또 다른 뒷방이 대성전이요, 뒷방 서원의 또 다른 뒷방이 사당으로 굳어져 있다. 그러나 외국인들이 오히려 ‘K-정신’ 공간으로서의 향교와 서원을 손꼽으며 미래의 정신문명이 불 지펴질 중요한 공간으로 주목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의 유림들도 이 뒷방을 버려두진 않는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공간으로서 자세를 가다듬는 것이다. 향교의 대성전은 ‘대성지성문선왕(공자의 별칭)’을 모시는 공간이니 특별히 조심스러우며, 서원의 사당 역시 그 서원의 배향 인물의 인품을 계승하고자 춘추로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따라서 뒷방은 그냥 뒷방이 아니라 정신문화의 보고이자 역사의 연결점이며, 고귀한 인품의 시작점인 것이다.

책은 읽는 사람에 따라서 양서(良書)가 되고, 악서(惡書)로 되는 것이라고 한다. ‘뒷방늙은이’는 뒷방으로 버려진 노인이 아니라 소중한 경륜과 풍부한 경험을 보유한 우리 사회의 도서관인 것이다.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대단한 경전(經典)으로 회자 될 수 있는 고귀한 ‘뒷방 어르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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