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KTX로 서울을 다녀왔다. KTX 열차 내부에는 전광판과 텔레비전 형태의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다. 여기에는 출발 시간이나 도착역 등의 열차 정보를 제공하고 광고, 홍보, 예능, 뉴스를 송출하고 있어서 보는 사람들이 많다. 단양에 대한 홍보 영상이 모니터로 나오는데 삼봉 정도전에 관한 내용이었다.
어린 시절 정도전이 도담삼봉을 좋아해서 자주 놀러 오게 됐는데, 도담삼봉에서 호를 따서 삼봉이라 했다는 것이다. 정도전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서 홍보하는 단양의 입장이야 우리가 언급할 수는 없지만 영주 사람으로서 서울을 오가면서 영상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1369년 여름, 정도전은 영주에 있는 선영에서 부모의 3년 상을 마치고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왔다. 지금에 북한산이라고 불리는 삼각산에서 멀리 송도 즉 개경이 있는 송악산을 바라보면서 옛 친구를 떠올리며 시를 지었다. 「삼봉을 보며 송도 옛 친구를 생각하며(登三峯憶京都故舊)」였다.
단정하게 앉아 있다가 먼 그리움이 일어나/ 삼봉(三峰) 마루에 오르네/ 서북쪽으로 송악산을 바라보니/ 검은 구름 높게 무심히 떠 있네/ 그 아래 옛 친구가 있어/ 밤낮으로 서로 어울려 놀았네/ 날아가는 새는 구름 뚫고 들어가니/ 나의 그리움은 아득하고 멀기만 하네/ 지초(芝草)를 캐 보았자 한 줌도 아니 되니/ 저기 길가에 내버려두네/ 한 번 다녀오는 것 어려운 일 아니지만/ 어째서 이다지 망설이게 되는지(후략)
삼봉은 이 제목 아래에 스스로 주를 달며, “병오년에 연이어 부모상을 당하여, 영주에서 3년 복제를 마치고, 기유년에 삼봉의 옛집으로 돌아왔다.”라고 하였다. 삼각산은 북한산의 옛 이름으로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졌는데 백운봉, 인수봉, 만경대이다. 삼봉 마루에 올라 멀리 개경 땅 송악산을 바라보면서 벗들과 어울렸던 개경의 시절을 떠올리며 그리움이 젓은 마음을 시로 쓴 것이었다. 개경의 중앙 권력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정도전으로서는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 시를 읽고 친구들은 정도전이 삼각산의 풍모와 닮았다고 해서 ‘삼봉(三峯)’이란 호로 부르게 되었다. 삼봉도 이 호를 즐겨 사용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삼봉은 삼각산을 삼봉이라고 표현한 시를 여러 편 썼다. 1370년 여름, 개경으로 올라가 이숭인의 집을 방문하면서 쓴 시에서, 김구용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은 시에서, 부여에서 찾아온 이존오와 함께 삼각산에서 달을 보며 회포를 푸는 장면에서 모두 삼봉이란 표현을 썼다.
삼봉에 대한 여러 가지 기록이 많은 시를 통해서 남아 있다. 그 시를 접해 본 필자로서는 도담삼봉을 보고 정도전이 호를 삼봉으로 정했다는 홍보 영상을 보면서 씁쓰레한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문제는 사실 여하를 떠나서 이런 내용이 반복적으로 열차 안에 재생되고 있다는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은연중에 접하면서 역사적인 사실로 둔갑해 간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객실에서 항변할 수도 없으니 혼자 홍보 영상을 보면서 속을 끓일 뿐이었다.
“도적을 피하여 내 땅을 떠나/ 가족을 이끌고 다른 고을로 이사하네/ 가시덩굴 스스로 앞을 가리고/ 상재(桑梓)는 눈에 선해 잊기 어렵네/ 세상이 험난하니 어린아이 가엾고/ 집마저 가난하니 어진 벗 기댈밖에/ 천지는 부질없이 넓기만 하니/ 내 흥취 아득아득 홀로 섰노라”
삼봉 정도전이 고향 영주에 머물면서 유랑생활을 이어가고 있을 때 왜적이 쳐들어와 고향 영주를 떠나며 그리운 심정을 「피구(避寇)」로 읊었다. 상재(桑梓)는 고향 집을 이르는 말로 영주가 삼봉의 선대가 대대로 살아온 곳이라는 뜻이다. 왜적을 피해 고향 영주를 떠나서 간 곳이 바로 삼각산 아래에 짓고 후학을 가르친 삼봉재(三峯齋)란 초막이었다.
KTX 광고를 보면서 마음이 무척 착잡하다. 왠지 모르게 뒤쫓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학문도 게을리할 수는 없으나 문학이나 예술적인 접근 또한 등한시해서는 안 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