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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확대경

배용호(前 영주교육장)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321] 소수서원의 장서각(藏書閣) 앞에서

2025. 10. 16 by 영주시민신문

<서적(書籍)을 쌓아 놓고, 벗을 맞이하라>는 말이 있다. ‘책이 없으면 친구를 초대할 수 없다’는 말로 들린다. 그만큼 예나 지금이나 서적은 대단히 중요한 진리였던 모양이다. 고려 때는 서적 인쇄를 맡아온 관아가 따로 있었다. 서적원(書籍院)이다. 뒤에 서적점(書籍店)으로, 서적포(書籍鋪)라고 명칭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서적’이라는 두 글자는 빠트리지 않았다.

책이 귀했던 시절, 많은 서원(書院)에서 다투어 사액(賜額)을 청원했던 이유도 서적 하사(下賜)에 대한 기대 비중이 크다. “서적과 편액을 내려주시고 겸하여 토지와 노비를 지급하여 줍시사…” 보통 이렇게 주청을 올린단다. 토지와 노비보다 서적의 비중이 크다는 뜻이 아닐까. 그런 서적을 보관하는 곳을 서적소(書籍所)·서적관(書籍館)·장서고(藏書庫)·​장서각(藏書閣) 등으로 불러왔다.

​장서각은 원래 나라의 중요한 사적(事跡)을 보관하던 곳이었다. 궁궐 안에 전(殿)·관(館)·각(閣) 등을 세우고 많은 전적을 모아 왕의 자문에 대비했다. 그래서 세종은 집현전(集賢殿), 세조는 홍문관(弘文館), 영조는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했다. 일반 서원, 향교 등에서도 장서각을 설치했다.

소수서원의 장서각은 3000여 서책을 보관하던 도서관이다. 소수서원 창건 시기에 세워졌다니 근 500년이 되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서쪽을 중시하는 위차(位次)와 오른쪽을 우선으로 삼는 예를 고려하여 으뜸 자리인 스승의 숙소(직방재) 보다 우측에 세웠다. 그리고는 임금이 내린 「어제 내사본」을 비롯한 많은 장서를 보관했다. 아울러, 서책은 ‘서원 밖으로 가지고 나가지 못한다’는 규정을 주세붕이 직접 만들 정도로 서책을 귀히 여겼다.

도산서원에도 서책을 보관하던 광명실(光明室)이 있다. 전교당 마당 앞 양편 누각형 두 건물이다. 가장 많은 장서를 자랑했던 옥산서원은 서책을 청분각(淸芬閣), 경각(經閣), 어서각(御書閣) 등에 나누어 보관해야 할 정도였다. 장서각이 서원의 격을 대변한다는 인식으로 가득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요즘은 ‘도서관(圖書館)’이라고 하는데, 그 명칭의 시작은 19세기 말 도쿄대학도서관부터라고 한다. 이후 ‘도서관령’이 공포되면서 ‘서책’과 ‘그림’을 동시에 소장하여 ‘도서관’이란 명칭이 굳어진 거라는데, 그렇다면 ‘도서관’이 아니라 ‘서도관(書圖館)’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일설에는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에서 뒷글자를 따 ‘도서관’이 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여간 지금은 도서관이다. 그보다 규모가 작고 예쁜 곳에 책을 꽂아 두고 ‘서점’이나 ‘책방’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렇지만, 그리 쉽고 예쁜 이름으로 서둘러 개명한 이들마저 이제는 책방을 잘 들르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폰에 검색창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검색창은 어디까지나 인덱스(색인)일 뿐, 그걸 독서로 취급할 수 없다는 게 식자(識者)들이 양보하지 않는 견해이다. 새벽 공기를 가르는 신문 잉크의 냄새, 손으로 넘기는 책장의 손맛, 낚시꾼 손끝의 ‘짜릿한 감촉’들이 서로 어울리는 비유가 될 수 있을까만, 어찌 됐든 휴대폰 독서는 어쩐지 끔찍해 보인다.

최치원은 독서량이 1만 권을 넘겼다고 한다. 신라에 안 읽은 책이 없어 책을 찾아 중국으로까지 건너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책 보지 말라”고 성화이던 성철 스님도 서책 1만 권을 소장한 장서가였단다. 이들은 독서가 만고의 진리라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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