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320] 풍기는 살만한 땅인가 <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 오피니언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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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확대경

배용호(前 영주교육장)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320] 풍기는 살만한 땅인가

2025. 09. 27 by 영주시민신문

풍기(豐基)의 지세에 관해서는 1997년 서정학(徐廷學)이 주도 발간한 풍기읍지(豊基邑誌)에 잘 요약되어 있다.

「풍기는 영남의 관문(關門)으로 소백산의 도솔봉(兜率峯), 연화봉(蓮花峯), 비로봉(毗盧峯), 국망봉(國望峯) 등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남쪽으로 멀리 학가산을 성문처럼 바라보며 곱살한 야산으로 성벽을 둘렀다. 북쪽에는 노인봉과 남쪽에는 천부산(天浮山)과 자래봉(自來峰)이 있다. 소백산 무릎에 안겨 풍기 바닥을 내려다보는 ‘금계바위’는 연화봉 동남쪽으로 뻗어내려 수려하게 자리하고, 그 맥에서 떨어져 서남으로 다시 십여 리를 뻗어내려 시가지 서쪽에 이르러 예쁘게 도사린 봉우리가 보평대(保平坮) 공원산이다.

그 산 남쪽 기슭들 가운데 거북 모양으로 엎드려 있는 독산(獨山)은 인공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보평대 여맥(餘脈)이 숨어 뻗어내린 천작(天作)이다. 도솔봉 지맥이 뻗어 들 가운데에는 마치 말 모양의 마산(馬山)이 있고 동남쪽들 가운데 토성산(土城山) 일명 덕아산이 있다. 동남쪽으로 잇봉우재[生峴], 서쪽으로 죽령, 남쪽으로 힛틋재[礪峴], 동북쪽으로 잠뱅이재[点方峴], 서남쪽으로 고리목재[骨里峴]가 있다.」

소백산의 주봉인 ‘비로봉’은 낙동강과 남한강의 분수령(分水嶺)으로 북으로 남한강의 시원(始原)으로 흐르고, 남으로 낙동강의 시원이 되어 희방폭포의 장관을 쏟아낸다. 다시 도솔봉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합쳐 남원천이 되고 시가지를 쓰다듬어 토성(동부5리) 마을 앞에서 북천과 어울려 안정들을 누비고 서천이 되어 남으로 흐른다. 이 두 갈래의 냇물에 힘입어 좀처럼 가뭄과 수해를 모를만하니 지명 그대로 풍년터[豊基]라 하겠다.

풍기의 평야는 세로 20리 가로 15리인데 희여골, 적전들, 삼가(三街), 욱금들, 매끼실[味谷], 산의실[山法里] 등에도 작은 들이 열려있긴 하다. 하지만 소백산의 바람 그늘에 해당하기 때문에 연평균 강수량은 많지 않은 편이다. 이런 계단상 지형의 많은 일조량과 적은 강수량이 오히려 과수의 당도를 증가시켜 준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소백산맥의 길다란 골짜기가 ‘깊은 샘물’ 역할을 해주기에 적은 강수량이지만 논농사가 거뜬한 것이다. 또한, 금계들과 창락들은 일찍부터 남북천 양수지간이라 하여 주세붕(周世鵬)의 인삼 시발지의 터를 열어주었던 것이다.

풍기는 삼다(三多)의 고장이라고도 한다. 황씨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고[黃], 나뭇가지들이 모두 동남쪽으로 쏠릴 만큼 바람이 강하며[風], 어느 땅을 파 뒤져도 모두 돌들이 받치고 있다[石]는 뜻이다. 그렇지만 풍기는 삼재불입(三災不入) 제일승지이다. 병화, 질병, 기근이 없다. 삼무(三無)인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양백지간 명당에다, 금환낙지형(金環落地形) 지세로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곳이다.

삼국 시대 기목진(基木鎭)으로 불리던 풍기는 고려 때 기주(基州)로 개칭되었다가 조선 때 다시 기천(基川)으로 바뀌게 된다. 당시는 팔도의 큰 고을에만 주(州)자 지명을 쓸 수 있었던 고로 작은 고을의 지명은 천(川)이나 산(山)으로 격하시켰다. 여기에다 ‘기천’은 얼마를 지나지 않아 다시 개명의 고초를 겪게 된다. 조선 1451(문종1)년 은풍(殷豊)과 기천을 합쳐 풍기군이라 한 것이다.

당시 은풍은 풍기의 속현이었기에 당연히 ‘기풍군’이 되어야 함에도 은풍에 문종의 태실(胎室)을 안치되었다는 이유로 은풍의 ‘풍’자를 먼저 배치하여 ‘풍기’가 된 것이다. 하지만, 풍기는 이런 고초에 연연하지 않고 기목진(基木鎭)-기주(基州)-기천(基川)-풍기(豐基) 이렇게 이어지면서 어느 때건 ‘기(基)’자를 빠뜨리지는 않았다. 아마도 터가 좋다는 뜻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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