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AT’란 특정 분야에서 역사상 최고의 인물을 지칭한단다. 조선 유학(儒學, 道學)의 GOAT는 아무래도 퇴계(退溪) 이황(李滉)이어야 하지 않을까? 안향(安珦)이 들여온 성리학을 반석 위에 올린 분이 이황이었기 때문이다. 이황은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으나 을사사화 이후 고향 토계에 은거하여 학자의 삶을 살았다. 그가 진실로 조선 유학의 ‘GOAT’로 꼽혀야 하는 이유는 그의 학문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만인들에게 나누어주고자 했던 데에 큰 의미가 있다. 그 중심에 서원이 있었다.
서원의 성립 배경은 사림의 향촌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사림들은 일찍부터 향촌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거듭된 사화로 향촌 사회가 어수선해지자 향촌 사회를 다잡기 위한 교화의 필요성을 대두시켰다. 특히, ‘문묘종사운동’ 등은 도학의 중요성을 깨우치기 위해 두드러진 도학자를 문묘에 제향해야 한다는 명분과 함께 향촌민의 교화라는 목표를 동시에 갖고 있다. 그 결과물로 나타난 것이 서원이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안향(安珦)을 모시는 사당을 세워 배향하다가 이듬해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최초로 건립했다. 그러나 초창기 백운동서원은 어디까지나 안향을 모시는 사묘(祠廟) 위주였고, 교육을 위한 서원 강학은 그 부속품 같은 위치였다고 한다. 이런 서원 강학이 독자성을 가지게 된 것은 이황에 의해서라고 본다.
그는 오로지 도학을 천명하고 밝히는 길은 중국의 서원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풍기군수가 되면서 노골적으로 서원에 대한 국가적 지원을 요구하였다. 이른바 사액 요청이었다. 이렇게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사액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그러고도 그는 이산서원원규(伊山書院院規)를 지어 전국 서원 원규의 표본으로 삼게 하는가 하면, 그 뒤 고향인 예안에서 역동서원(易東書院) 설립을 주도한다.
이처럼 초창기 서원 18개소 중 10여 곳 서원에 대해 설립에 참여하거나 서원기(書院記)를 지어 보내는 등 직‧간접으로 서원 설립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이러한 서원의 외형 확대와 아울러 내용 면에서도 충실을 기했다. 유생의 장수처로서의 강당과 존현처로서의 사묘를 구비한 서원체제를 정식화하고, 원규(院規)를 보급하여 서원의 학습활동과 그 운영방안을 조정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초기부터 계속된 향촌 사림 활동의 구심체는 마침내 서원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고, 이들의 상당 부분이 이황에 의하여 정착, 보급되기에 이른 것이라 하겠다. 이런 연고로 이황 거주지 중심의 경상도 지역이 전국 서원의 절반 이상이 되었다. 그의 도학 절정기인 선조 당대에 세워진 서원만 60여 개소를 넘었고, 그중 22개소에 사액이 내려졌다. 지역별로도 초창기의 경상도 일변도를 벗어나 전라·충청·경기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이처럼 이황은 서원의 전국적인 확산 보급에 절대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후기로 오면서 당파 형성에 학연(學緣)을 절대적으로 이용하였고, 향촌은 서원의 통로로 중앙과의 연결을 시도했다. 이로 인한 서원 설립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남설의 폐해가 거론되게 되었다. 숙종 대에 166개소나 건립되던 서원은 급기야 정부 차원의 통제 대상이 되었으나 ‘서원(書院)’이라는 명칭 대신 ‘사우(祠宇)’라는 형태는 오히려 증가하였다. 제향 인물도 뛰어난 유학자이어야 한다는 본래의 원칙을 벗어나, 관리, 수령(守令), 집안 인물까지 추향(追享) 되어 그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다.
그러다 보니, 서원은 사림들의 강학 활동, 향촌 운영, 의병 활동의 거점까지 수행하는 등의 여러 가지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으면서 서원철폐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고, 결국,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정비하던 흥선대원군에 의해 전국 1000개 소에 육박하던 서원‧사우는 47개 소만 남기고 모두 철폐되는 인고를 당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