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에서 오늘 생긴 일, 통곡하며 하늘을 본다/ 난간을 탁 치고 한번 웃으니, 한낮의 해가 다시 빛나는구나/ 나라가 망해버린 세상에 태어났는데, 창자 속은 무엇으로 가득한고/ 의로운 붉은 피가 엉겼으니, 확 뿌려서 동양(東洋)을 씻어냈으면/ 옛 왕국을 찾기 위해, 의로운 사람들과 사귀어왔는데/ 죽겠노란 맹세가 하늘과 해를 뚫나니, 만 가지 형벌인들 몸을 사리랴.” 채기중(蔡基中) 선생이 목포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면서 읊은 시이다. 선생의 의기와 투지가 시 곳곳에 배어 있다.
선생은 경북 함창(상주)에서 출생하여 성장하다가 그가 태어난 함창현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어 1906년 소백산 자락의 풍기로 이주하여 재산을 모으고 동지를 규합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1913년 정월 강순필, 한훈, 김상옥 등과 함께 대한광복단을 결성하고 초대 단장이 되었으며 1914년 말에는 「모험용사대」라는 군대를 조직하여 무장하였다. 그리고 영주와 봉화의 자산가를 조직해 자금조달의 거점으로 대동상점을 설립한다. 친일 부호를 처단하기도 하고 군자금을 지원하다가 1921년 서대문감옥에서 순국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일제에 의한 1909년 남한대토벌작전 이후로 1945년 광복 때까지 국내에서는 조직적인 항일 무장 투쟁은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고 기술하면서 주로 만주 일대에서 독립군이 활동하는 것으로 그 맥을 잇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풍기에서 조직적으로 무장한 대한광복단이 조직되었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역사적 사실임을 알게 된다. 더욱이 1915년 광복회로 확대 개편되어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싸우게 되니 정말이지 우리 영주의 자랑이요, 영주 시민이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다음부터 선생 생략)
대한광복단은 비밀조직이어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채기중 선생을 만나 대한광복단 조직에 관여하면서 사돈을 맺은 벽도(碧濤) 양제안(梁濟安) 선생이 쓴 글에 채기중 선생과 박상진 선생의 첫 상봉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풍기에 채기중이라고 하는 참된 의사요, 영웅이 있어 지금 현인들을 모으고 있으니, 그대는 거기 가서 참여하는 것이 좋겠소. 그리하여 이복우, 박상진 등이 만주로부터 와서 공(양제안)의 차자인 양한위와 함께 채기중을 방문하였다.” 이 만남이 1915년 광복회로 조직이 확대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풀어서 설명하면 양제안의 소개로 박상진은 풍기의 채기중을 찾아오고 둘은 의기투합하여 한훈, 노백린 등과 함께 군대 조직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이 조직이 바로 대구 달성 공원에서 결성식을 한 ‘광복회’이다. 광복회는 총사령으로 박상진이 맡고 채기중은 경상도지부장을 맡았으며, 대한광복단에서 활동한 김한종은 충청도지부장이 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김좌진 장군은 만주의 부사령관직을 맡게 되니 실로 어마어마한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광복회의 운영은 박상진과 채기중의 쌍두체제로 운영되었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2025년 8월 15일 광복절이 다가오고 있는 지금, 광복회 홈페이지를 보면 대한광복단과 관련된 자료가 거의 극소수에 불과하다. “1910년대 국내에서 조직된 독립의군부·풍기광복단·민단조합·달성친목회·조선국권회복단과 한말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연합해 창립했다.”, “영주에 설치된 대동상점은 광복회의 활동 거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길림광복회 조직비용을 조달했다.”, “광복회 지부 중 충청도·경상도·전라도·황해도·평안도 지부는 광복회 활동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왜곡까지는 아니지만 뭔가 핵심이 빠진 듯한 기술이다. 분명히 영주의 대동상점이 길림성 비용을 조달했다든지, 광복회 지부 중 대한광복단과 관련된 충청도, 경상도 지부가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고 하면서도 대한광복단에 대한 설명을 빠져 있는 것이다. 이번 광복절을 맞아서 우리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풍기에서 조직된 대한광복단의 위상을 되찾아야 한다. 그러고 보니 영주의 광복로에는 누가 봐도 자랑스러운 독립이 있고 광복이 펄럭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