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시인 왕유가 쓴 시 중에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송별 시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가 있다. 서북 변방의 땅인 안서(安西)로 떠나는 친구 원이(元二)를 위성에서 작별하며 쓴 시이다. “위성조우읍경진(渭城朝雨浥輕塵) 객사청청류색신(客舍靑靑柳色新) 권군갱진일배주(勸君更盡一杯酒) 서출양관무고인(西出陽關無故人) 위성의 아침 비가 가벼이 먼지를 적시고/ 여관 옆 버드나무는 더욱 푸르고 새롭구나/ 그대여, 이별의 술 한 잔을 더 비우시게/ 서쪽 양관을 넘으면 권할 친구도 없으리니.”
왕유의 송별 시를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가르쳤다. 자연의 청신한 아침 풍경과 이별의 고요한 슬픔이 선명하게 교차하는 데서 오는 감정의 대조로 인해 오랜 세월 동안 사랑받고 있다고 가르친 기억이 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금 생각하면 왕유가 쓴 이별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한 가르침이었다. 이유의 핵심은 바로 양관(陽關)에 있었다. 이 시에서 이별의 술잔을 나눈 곳은 중국의 수도 장안이었다. 양관을 장안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영주로 치면 제천이나 원주쯤으로 생각하고 가르친 것 같다.
양관은 오늘날 위치로는 둔황시 남서쪽에 있으며, 한나라 때 장건(張騫)이 서역으로 향할 때 통과한 관문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실크로드(Silk Road)는 장안(長安)에서 출발해서 이 양관을 거쳐서 서역으로 들어가니 양관은 바로 중국의 서쪽 끝에 해당한다. 중국 고대의 수도 장안에서 출발해 둔황의 양관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기준으로 약 2,500km의 먼 길이 가야 하는 곳이다. 지금은 고속철도를 타거나 비행기로 이동을 하지만 말을 타거나 사막을 걸을 때는 낙타를 타고 가는 길이었으니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이었다.
지난 주간에 영주문화연구회에서 둔황으로 중국 문화 탐방을 하였다. 장안이라 불렸던 시안에서 고속열차로 6시간을 달려 장예로 가서 둔황까지 버스로 4시간을 갔으니 실로 어마어마한 거리였다. 둔황은 중국 가장 서쪽에 있는 대표적인 오아시스 도시이자 고대 실크로드의 요충지다. 여기에서 북쪽으로는 옥문관을 통해 서역으로, 남쪽으로는 양관을 통해 서역으로 가는 곳이었으니 중국과 서역을 연결하는 교통·무역·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 둔황에서 버스로 한참을 가면 양관이 나온다.
중국의 마지막 땅끝 양관, 언덕에 올라서면 만년설에서 흘러내린 물이 강물로 흘렀음 직한 저 건너 아득한 곳에 서역 땅이 아스라이 보인다. 이 길을 따라 한나라 때부터 당나라,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걸으며 다양한 감정을 품었을 것이다. 고향을 등지는 외로움과 죽을 수도 있다는 마음,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길 떠나는 사람들은 안다. 마음 한쪽에는 미지의 길을 간다는 설렘과 자부심도 가슴 가득하게 품었을 것이다. 두려움과 희망이 교차하는 곳이기에 양관은 외로움과 가능성이 혼재하는 곳이기도 했다.
둔황까지 가는 길이나 둔황에서 양관으로 가는 길에 척박한 모래만 보일 뿐 들판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가끔 모래 둔덕에 쓴 모래 무덤 앞에 놓인 비석만이 그것이 무덤임을 말해 준다. 왕유의 시에서 친구 원이(元二)가 장안에서 양관으로 부임하게 되니, 보내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아마 죽음의 땅으로 가는 친구를 보내며 술잔을 기울이는 것이니 이별의 절절함이 그 얼마나 깊었을까. 그러나 이 시를 가르칠 때는 양관이 이런 곳임을 몰랐으니 그 절절함과 깊이를 가슴 깊이 느낄 수가 없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진작에 양관이 이런 곳인 줄 알았으면 학생들에게 더 깊이 있는 수업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순례의 길을 떠나는 승려들의 마음을 읽었을 것이다. 죽음의 땅으로 임지를 옮겨 가는 관리의 마음을 알았을 것이다. 낙타 떼를 거느리고 돌아올 기약 없이 고향을 떠나는 상인들. 변영로의 시 ‘논개’가 갑자기 떠올라 패러디한다. 거룩한 이별은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눈물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