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서원 명륜당 뒤쪽에 별도 담장을 두른 「문성공묘(文成公廟)」라는 사우(祠宇)가 있다. 우리나라 성리학의 비조(鼻祖)로 칭송되는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안향(安珦, 1243~1306)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주세붕이 소수서원보다 1년 앞서 세웠다.
그런데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썼다는 문성공묘 현판을 자세히 보면, 흔한 사당 사(祠)를 쓰지 않고 별스럽게 사당 묘(廟)를 쓰고 있다. 둘 다 사당이란 뜻이긴 하지만, 묘(廟)는 제왕이나 이에 버금가는 성인(聖人)의 위패를 모시는 곳에만 붙이는 특별한 명칭이다. 그러니 일반 서원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건물의 규모는 3칸짜리,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고, 높지 않은 기단 위에 둥글게 초석을 놓고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남쪽으로 신문(神門)을 설치해 두고 우측 협문(夾門)으로 통행한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매년 3월, 9월 초정일(初丁日)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이때 제향을 진행하는 홀기(笏記)가 주세붕(周世鵬)이 초안했던 홀기이다. 이 홀기 역시 국내 서원 홀기의 효시임은 물론이다.
문성공묘 제향에는 특이하게 「도동곡(道東曲)」이라는 경기체가(景幾體歌) 악장(樂章)을 부르게 되어 있다. 중국 남송의 주자(朱子, 朱熹) 이후 무너진 유맥(儒脈)을 한국으로 옮겨와 이은 회헌(晦軒) 안향(安珦)에 대한 찬양가이다. 주세붕이 창작한 것으로 알려진다. 즉, 도[道]를 동쪽[東]으로 옮겨옴을 찬양한 노래[曲]이다. 이곳이 우리나라 도학(道學)의 연원임을 보여 주는 상징적 행위이다. 종묘(宗廟)에서 제례악(祭禮樂)을 연주하는 것과 같은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서원 제향에 악장을 부르는 것은 문성공묘만이 보유한 고유문화이다. 이렇게 여타 서원들과 차별화된 문성공묘 제향은 그 독특한 문화유산으로서 보존 가치가 높아 일찍부터 무형문화유산 감으로 꼽혀 왔었다. 이런 내용을 자신들도 알고나 있다는 듯 담장 밖의 소나무들이 기이하게도 문성공묘를 향해 몸을 숙이고 있다. 문성공묘는 2017년 국가 보물(제1402호)로 지정되었다.
이런 대단한 격조에 비해, 문성공묘의 외형은 너무 소박하다. 다른 서원들이 입구에 높다란 누각을 세운다든가 서원 정문(외삼문)과 사당 앞문(내삼문)을 화려한 삼문으로 장식하는데 비해, 소수서원은 단출하게 단문으로 설치하였다. 이는 내핍생활을 강조한 안향 자신의 유언에 의한 것이라고들 한다.
그러고도 눈 여길 것이 또 있다. 명륜당과 문성공묘의 배치 문제다. 보통의 경사지를 택한 서원들은 위엄을 유지하기 위해 선현의 사당을 뒤쪽 높은 곳에 안치하여 자연스럽게 전학후묘(前學後廟) 배치가 되도록 하는데, 소수서원은 공간 자체가 평지여서 위엄을 갖출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동쪽에 강학공간(명륜당), 서쪽에 제향공간(문성공묘)을 두게 된 모양이다. 이른바 동학서묘(東學西廟) 구조다.
여기에는 이서위상(以西爲上) 즉, ‘서쪽을 으뜸으로 삼는다’는 우리의 전통 위차법(位次法)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명륜당이라는 중심 강당이 동향하고 있으니 전학후묘(前學後廟) 형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서원에서는 교육을 중시한다는 뜻에서 강학당을 서원 중앙에 배치한다. 교육을 바탕으로 삼아온 나라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재론할 필요야 없겠지만, 선조들은 <교육이란 반드시 현인을 받드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서원을 세우고 사당을 숭상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래서 교육은 국난을 막고, 기근을 구제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다.>라고 교육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그 중심이 또한 소수서원이요, 문성공묘다. 이곳은 문성공의 궐리(闕里)이다. 교육을 바로 세우려면 반드시 문성공 현창(顯彰) 사업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근간에 <회헌안향선생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다. 처음은 아니다. 몇 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늘 실물경제에 밀리면서 성공하지 못했던 영주의 숙원사업이자 대한민국의 숙원사업이었다. 늘 교육의 정점, 인성교육의 정점을 외쳐왔던 ‘선비의 고장’에서 회헌 선양사업이 출범된다고 하니 만시지탄이나마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