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8일은 대한민국 ‘철도의 날’이다. 본래는 우리나라 최초의 경인선 일부 구간이 부분 개통한 1899년 9월 18일을 ‘철도기념일’을 삼았었다. 그러다가 문재인 정부에서 대한제국 철도국 창설일인 6월 28일로 변경하여 현재까지 시행하고 있다.
19세기는 기적소리가 요란하던 시기였다. 세계 철도는 광산에서 나무 레일로 인력거를 만들어 사용하던 16세기를 그 기원으로 삼는다. 이후 19세기 초 영국에서 증기기관차가 개발되었고, 1825년 최초 상업용 철도 개통이 이루어지면서 산업혁명의 불씨가 당겨지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철도는 단순히 승객과 물자의 운송을 넘어, 지역과 지역을 교류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그래서 철길의 유무를 두고 지역 수준을 판가름하게 되면서 역 주변이 엄청난 텃세를 행세했었다. 지금의 역세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특히, 우리나라 철도는 일제강점기의 굴곡 속에서도 민족의 희망을 싣고 달렸고, 광복 이후에는 전쟁의 상처를 딛고 대한민국 건설에 핵심 역할을 담당했으며, 산업화 시대의 고속 성장의 원동력 역할로 더욱 대접이 공손했으며, 오늘날의 코레일 KTX는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으로 전국을 하나로 얽고 있다.
영주는 1941년 7월 1일 당시 서울~경주 간 경경선(중앙선)의 개통으로 철도의 시대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1950년 영암선(영동선)의 영주~내성 구간이 개통되면서 분기역이 되었으며, 1966 경북선이 개통되면서 영주는 네거리 철도가 완성되었다. 이후, 영주역은 영주동 중앙시장 부근에서 원도심 활성화에 충실하다가 대수해 이후에는 다시 1973년 휴천동 벌판으로 이전하여 역세권 발전을 또한 이끌었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지금 영주철도는 KTX 개통과 더불어 지역의 새로운 활력소로 재등장을 꾀하고 있다. 그간 영주 철길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대표적인 변화가 이른바 경북선 이설 사건이다.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군수물자가 모자란 일제가 철(鐵) 공출을 위해 조선의 철길을 걷으면서, 이때 점촌~예천~안동 구간이 폐선되었다.
광복 이후에 이를 복원하면서 경북선과 영암선(영동선) 직통 연결을 위해 기존의 예천~안동 대신 예천~영주 구간으로 선로가 변경되자 영주가 경북 철도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안동철도국’ 마저 ‘영주철도국’으로 이전되었다. 이후 반세기 동안 영주는 서울, 대전, 부산, 순천과 더불어 한국철도의 5대 거점이 되었다. 60년이나 더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옛 철도 구간과 안동인들의 가슴 속에는 그 흔적이 선명하다.
한때, 영주지방철도청은 중앙선, 태백선, 영동선, 경북선 등 4개 노선 690㎞를 관장하면서 종사원 7천여 명이 하루 승객 2만여 명, 화물 12만여 톤의 수송을 담당할 만큼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더구나 이런 교통 여건으로 대한석탄공사 임무소와 내성세무서까지 영주로 이전되면서 석탄과 나무 사업이 활발했던 7~80년대 영주가 경북 북부 중심도시로 각광 받았다.
지방철도청과 영주역이 자리한 휴천동 일대는 상업 중심지로 크게 발전하였고 ‘철도공무원 없으면 술집이 망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지역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후 석탄산업의 사양화와 도로교통의 발달로 여객 수까지 크게 줄어들면서 90년대 이후부터는 예전 영화가 크게 퇴색되었다. 그러다가 2021년을 기점으로 KTX 운행이 개시되면서 영주 철길은 다시 활력의 불길을 당기기 시작했다.
영주 역사(驛舍)에도 세계문화유산 부석사와 선비 정신의 소수서원을 건축에 반영하고, 영주의 도시재생 전략과도 조화를 이루어 다시 한번 부활을 꾀하고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 철도발전의 상징인 영주역 일대는 아직도 한국철도공사 영주지역사무소가 위치하고, 옛 철도관사들이 포함된 근대역사문화거리가 부근에 있어 철도여행지로도 인기가 살아나는 곳이 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