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313]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와 소수서원 경렴정 <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 오피니언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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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前 영주교육장)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313]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와 소수서원 경렴정

2025. 06. 13 by 영주시민신문

경렴정(景濂亭)은 소수서원으로 들어가는 정문 오른쪽에 다소곳이 정좌한 정자이다.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는 대표적인 유식공간(遊息空間)으로 꼽힌다. 담장 안쪽의 강학영역과 바깥쪽 죽계 절벽의 유식영역을 완충하는 지점이라서 시회(詩會), 풍류, 심신 수양에 더없이 좋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의 변화를 멋지게 느끼면서 심신을 이완하고 호연지기를 기르기 좋은 곳이다. 백운동서원 건립과 함께 세웠으니 거의 500살에 가깝다. 국내에서 가장 오랜 서원의 정자인 셈이다. 동갑 나이 또래로 보이는 훤칠한 은행나무 보호수가 정자 곁을 찰싹 붙어서서 이 같은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전국에 흔한 것이 정자라지만 서원의 정문 입구에 정자가 설치되는 예는 특이하다. 남계서원의 풍영루나 도동서원의 수월루처럼 정문을 겸하는 누각으로 세워지거나 옥산서원의 무변루, 돈암서원의 산영루처럼 담장 안에 별도 공간을 차지한 경우는 자주 있지만, 이와는 별개로 담장 밖 독립된 공간을 차지한 경우는 그 자체가 별스러운 경우이다. 전국의 여러 서원이 당연한 듯 누각형을 선호하는데, 소수서원의 경렴정은 홀로 정자형을 고수하고 있으니 이 또한 특이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경렴정은 사방이 모두 트여 있어 개방적이나, 마루 사방으로 난간을 둘러 매무새를 고쳐 앉았으므로 안정감에는 별문제가 없어 보인다. 앞면 3칸 측면 1칸의 소박한 홑처마에 장대한 은행나무가 드리우면서 퍽 고즈넉해 보인다. 팔작지붕의 화려함보다는 주변에 동화되는 듯한 소탈한 모습이 더욱 매력적이다. 정문의 입구부터 품격을 갖춘 진입영역의 한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학자수 솔숲을 걸치고 죽계수도 조망할 수 있는 곳이어서 정자 본래의 취지가 잘 표현된 정자로 정평이 나 있다.

「景濂亭(경렴정)」은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를 우러러 받드는[景慕] 정자라고 한다. 주돈이는 인간의 도덕원리에 대해 새로운 유학이론을 창시하여 송나라 성리학(性理學)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즉, 성리학의 창안자가 ‘주돈이’라면 이를 집대성한 학자가 ‘주희(朱熹)’라는 말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과 이를 집대성한 이황으로 대신 설명될 수 있는 인물이다.

또한, 주돈이는 연꽃의 군자 이미지를 가장 절실하게 표현하여 선비들로부터 대단한 환호를 받은 학자이다. 중국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다는 이른바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 이야기이다.

“연꽃은 진흙에서 나왔으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은 물결에 씻기나 요염하지 않고, 속은 비었으나 곧으며, 덩굴이나 가지를 치지 아니하고, 향기는 멀리까지 맑으며, 꼿꼿하면서 정결하게 서 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나 함부로 가지고 놀 수 없는 꽃이다” 여기에다 그의 인품이 ‘맑은 날의 바람과 비 갠 후의 달[光風霽月]’에 곧잘 비유됨에 따라 경렴정 인근에 광풍대(光風臺), 제월교(霽月橋) 등이 둘레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곳에 주돈이를 추모하며 탁청지의 연꽃을 직시할 수 있는 지점의 경렴정이라 더욱 돋보이는 정자가 되는 것이다.

경렴정의 정자 자체는 고즈넉한데 걸려 있는 현판에는 여러 애환이 서려 있다. 경렴정에는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그러나 현판 작자 두 사람이 서로 스승과 제자 사이인지라 나란히 걸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듯, 하나는 정면에 다른 하나는 정자 안쪽에 걸려 있다. 정면의 해서로 된 현판은 스승 퇴계(退溪)의 친필이고, 안쪽에 걸린 제자인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의 초서 현판이 그것이다. 퇴계의 필적만으로도 여러 사람에게 회자 될 법한 일이지만, 고산 황기로는 전 조선을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초서의 대가여서 초성(草聖)이라고 불리기까지 했던 사람이다.

퇴계 선생이 고산에게 현판 글씨를 쓰게 했는데, 천하의 황기로도 스승 앞에서는 손이 떨려 제대로 글씨를 쓰지 못했던 모양. 이를 눈치챈 퇴계가 슬쩍 자리를 피하자 다시 붓을 든 황기로가 일필휘지하여 용이 비천하는 듯한 빼어난 글씨를 단숨에 완성했다. 후일 글씨를 친견한 일본인들이 용트림하는 글씨의 삐침에 깜짝 놀라면서 이 글씨의 정기가 조선의 큰 인물을 탄생시킬까 두려워 획의 끝부분을 잘라냈다는 황당한 이야기가 전한다. 이후 현판은 정성스런 봉합 수술에도 끝내 완쾌되지 못한 채, 소수박물관 수장고에 아직껏 몸져누워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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