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義湘, 625~702)의 속명은 김일지(金日芝)이다. 그는 신라 계림부의 최고 신분층이었던 진골 김한신(金韓信) 장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선나부인이 ‘하늘에는 태양[日]이 높이 솟고, 땅에는 백초의 으뜸이라는 붉은 지초(芝草) 꽃이 쟁반만 하게 핀’ 태몽을 꾸었다 하여 ‘日芝’로 이름 지었다. 당시 신라인 최고 로망은 ‘화랑으로 출세하여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었는데, 촉망받던 화랑인 일지는 왕족, 귀족들이 참관하는 무예대회에 일등을 차지하는 등 최고의 명성을 떨쳐 승만공주(후일 진덕여왕)의 흠모를 받기도 했다.
한신은 아들이 훌륭한 화랑이 되어주길 바랐는데, 동료들과 사냥 훈련을 나갔던 아들이 혼자 하산한 일이 있었다. 이에 “너는 훈련을 포기했으니 나라를 배신한 것이요, 부모의 뜻을 어겼으니 불효를 저질렀다. 함께하는 벗을 두고 도망쳐 신의까지 저버렸으니 「세속오계」 중 4계[사군이충, 사친이효, 교우이신, 임전무퇴]를 어긴 것이다”라며 종아리를 쳤다.
며칠 후 일지는 “저는 오로지 1계[살생유택]을 지키고자 나머지 4계를 어길 수밖에 없었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무장(武將)을 바랐던 아버지이지만 <나라의 위기에는 언제라도 목숨을 바치겠다>는 조건을 달아 출가를 허락했다고 한다. 그의 중국 유학 목표 10년을 다 채우지 못한 것은 그런 약속 때문이었다. ‘당나라가 신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알게 된 의상이 이를 알리기 위해 서둘러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의상은 장래를 약속했던 묘화(妙花)라는 여인까지 떨치고 20세에 낭산의 황복사(皇福寺) 안함(安含) 스님에게 출가했고, 황룡사의 자장율사(慈藏律師)에게서 계(戒)를 받았다. 은사인 안함 스님의 <효(曉)자 든 사람을 벗하고, 지(智)자 든 사람을 스승으로 삼아 공부하라>는 유언을 받들어 양산의 영축산으로 ‘원효(元曉)’를 찾아 그를 도반으로 삼았고, 당나라 ‘지엄(智儼)선사’를 찾아 유학길에 올랐다.
시안[西安]에 있는 종남산 지상사(至相寺)를 찾아간 의상은 중국 화엄종 2대 조사인 지엄선사 앞에 엎드려 큰절 삼배로 제자가 되기를 청한다. 지엄은 간밤에 꿈을 꾸어 의상이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해동국(신라)에서 커다란 나무가 불쑥 자라더니 그 줄기가 종남산을 뒤덮었고, 나뭇가지에서 신령스러운 빛이 뻗치므로 올라가 보니, 봉황새 둥우리에 마니보주(摩尼寶珠, 불가의 여의주)가 들어있었다는 꿈이었다.
당시 종남산에는 신라에서 공부하러 간 인물도 여럿 있었는데, 이웃 백천사에 도선율사(道宣律師)가 수도하고 있었다. 그는 끼니마다 하늘에서 보내주는 음식을 먹었다. 하루는 도선이 의상을 청했다. 그러나 그날따라 하늘의 음식이 내려 오지 않았다. 의상이 돌아가고 난 뒤 천사가 음식을 가지고 왔다. 늦은 이유를 물으니 “의상의 신병이 골짜기에 가득 차서 도저히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그때야 도선은 의상의 도력이 자신보다 한 수 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귀국 길에, 자신에게 후의를 베풀었던 양주의 유지인(劉至仁) 집을 찾았지만, 출타한 선묘는 보지 못하고 배를 타게 되었다. 의상이 다녀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선묘는 ‘영원히 스님을 모실 수 있기를 기원’하며 바다에 뛰어들었고, 용으로 화신하여 의상의 배를 무사히 신라에 도착시킨다. 이후 의상이 왕명으로 부석사를 창건할 때, 이교도의 저항을 받자 다시 선묘룡으로 나타나 큰 반석을 공중으로 세 차례나 들어 올려 잡배들을 물리쳤다는 창건신화가 송나라의 『고승전』에 실려 있다.
의상은 지상사에서 수도하는 동안 세 번이나 신비한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대가 깨달은 화엄의 도리를 속히 세상에 전하라는 부처님의 분부이다.”라고 지엄선사가 해몽하였다. 이에 의상은 자신이 깨친 화엄의 도리를 정리하여 올렸다. 지엄이 너무 길다며 쓴 종이를 불에 던졌는데, 신기하게도 그 가운데 210자는 끝까지 불에 타지 않았다고 한다. 그 210자 게송(偈頌, 부처님 찬미 노래)이 바로 유명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이다. 최치원이 지은 『의상전』에 실려 있는 이야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