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311] 정도전의 막역지우 김구용(金九容) <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 오피니언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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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확대경

배용호(前 영주교육장)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311] 정도전의 막역지우 김구용(金九容)

2025. 05. 17 by 영주시민신문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 1338~1384)은 고려 후기에 삼사좌윤, 성균관대사성, 판전교시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개성에서 태어나 철동에 있는 외가댁에서 자라면서 시서(詩書)를 즐기고 학문에 열중하던 외조부 민사평(閔思平)에게 자연스럽게 수학하게 되었다. 공민왕 때 16세로 진사에 합격하고, 18세에 문과에 최연소로 급제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특히, 왕명으로 모란시(牡丹詩)를 지었을 때 일등을 했으므로 왕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기도 했다. 후진들을 힘써 지도하였기에 비록 쉬는 날이라도 배우러 오는 학생의 발길이 그치지 않아 제자가 많은 것으로도 널리 알려진다. 경학(經學)에 밝았으므로 성균관이 중수(重修)되자 정몽주(鄭夢周)ㆍ박상충(朴尙衷)ㆍ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학관(學官)으로 발탁되어 성리학을 일으키는 선봉이 되었다. 강릉도안렴사(江陵道按廉使)를 지냈다.

고려 말의 천령현(川寧縣, 여주시 금사면 일대)은 여주와 양평을 관할하는 중심지였다. 개성을 오가는 길목이며 경치 또한 아름다워 자연스레 인물들이 모여 살았는데 그중의 한 사람이 김구용이다.

척약재 김구용이 활동하던 시기는 원(元)·명(明) 교체기였는데, 이때 고려는 원나라와 명나라에 양면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우왕 1년 김구용이 삼사좌윤(三司左尹)이 되었을 때 당시 북원(北元)에서 사신을 보내오자 이들을 맞으려는 이인임 등 권신들에 맞서 친명파인 이숭인, 정도전(鄭道傳), 권근(權近)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다 죽주(竹州, 안성)로 귀양을 갔다.

뒤에 외가 곳인 여흥(驪興, 여주)으로 귀양지를 옮겨 산수 경치가 좋은 강호에서 거처에 ‘육우당(六友堂)’이라는 편액을 달고, 시와 술로 자연을 즐겼다. 육우당의 육우(六友)란 강과 산‧눈‧달‧바람‧꽃[江‧山‧雪‧月‧風‧花] 이렇게 여섯 벗을 일컫는 것으로 즉, 자연의 여섯 친구를 말한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귀양이 풀려 1381년 다시 출사하였을 때, 8왕비 3옹주를 거느리고 있던 우왕의 무절제를 직간(直諫)하는 글을 올린 기개 있는 선비로 알려져 있다. 이듬해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국립대학교 총장)이 되었다가 얼마 뒤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다. 이때 고려와 명나라와의 국교가 난관에 부딪히자 김구용은 1384년 행례사(行禮使)로 명나라에 가면서 모시와 삼베 등을 가지고 가다가 사사로운 외교를 했다는 죄목으로 요동(遼東)에서 붙잡혀 남경(南京)으로 압송되었다.

운남성(雲南省) 대리위(大理衛)에 유배 가던 중 사천성(泗川省) 노주(瀘州)에서 병을 얻어 47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그의 제단(祭壇)은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금수단)에 있다. 외가와의 인연이 남달랐던 김구용은 아들이 없는 외조부 민사평의 문집을 간행하고, 제사를 자신이 스스로 모신 효손이었는데, 뒤를 이은 그의 후손들도 60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민사평의 제사를 함께 받든다고 하니 참으로 대단한 효손가문(孝孫家門)이라 아니 할 수가 없다.

한편, 외조부 민사평에게 내린 시호(諡號)가 ‘문온(文溫)’이었는데, 그의 무남독녀 외동딸의 장남 김구용의 시호도 하필이면 ‘문온’이어서 외조부와 외손자가 같은 ‘문온공(文溫公)’이 되었다.

김구용은 이색(李穡)을 중심으로 당대의 내로라하는 정도전ㆍ정몽주ㆍ이숭인 등 명유(名儒)들과 교유가 깊었다. 시를 잘 지었으므로 스승 이색으로부터 “붓을 대면 (시가) 구름과 연기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른다[下筆如雲烟]”는 최고의 칭찬을 받기도 했다. 특히, 정도전과 관계가 돈독했는데 그의 사후 아들이 그의 유작 500여 점을 수습하여 『척약재학음집(惕若齋學吟集)』을 발간할 때 정도전이 서문을 써 인연을 계속했다. '삼봉집'에도 정도전이 그의 집에 머물 때의 고마움을 표현한 「若齋旅寓(약제여우)」라는 시가 실려 있어 서로의 인연을 짐작할 만하다.

예천 감천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되었었는데, 물계서원은 훼철되었다가 최근 복설을 추진 중에 있다. 용궁의 무이리 청원정에는 그의 친필이라는 「淸遠亭」 글자 바위가 있다. 암벽 위에 올려진 삼각형 자연석이다. 이 바위는 어느 날 강으로 떨어졌는데, 강물 속에서 밤마다 자줏빛이 비추어져 자세히 살펴보니, 바위에 새겨진 글씨에서 나오는 빛인지라 다시 건져 올려 절벽 위에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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