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310] 소수서원의 취한대(翠寒臺) <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 오피니언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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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확대경

배용호(前 영주교육장)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310] 소수서원의 취한대(翠寒臺)

2025. 05. 02 by 영주시민신문

소수서원은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이곳 출신 성리학의 비조(鼻祖)인 안향 선생의 사표를 세워 위패를 봉안하고, 다음 해에는 학사를 건립해 백운동서원을 창건했다는 사실은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2019년 한국의 서원 9곳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는데 소수서원이 대표 역할을 무리 없이 잘 수행했음은 이미 알려진 바이다.

이런 소수서원의 진입영역 중 한 경관을 차지한 경렴정(景濂亭) 건너편에 빨간 글씨로 ‘敬’이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다. 소수서원 여러 경관 중에서도 가장 기절한 풍광을 갖춘 공간이다. ‘敬’자가 새겨진 바위이므로 당연히 「경자바위[敬石]」로 명명돼 있다. 선비가 깨달음을 얻는 성인(聖人)이 될 때까지 절대 놓지 말아야 할 글자가 ‘敬’이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멈추면 안 되는 것이 ‘敬’이므로, 성인의 학문과 사상을 배우기 위한 가장 밑바탕이 되는 마음가짐을 말하는 것이다. 창건자 신재 주세붕이 천년 소수서원의 원대한 목표를 바위에 새긴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원대한 기원과 깊은 뜻을 담은 신재(주세붕)의 경자바위 상단에 새로 후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1549년(명종 4)에 터를 다듬고 대를 쌓은 뒤 손수 소나무, 대나무, 잣나무를 심고 취한대(翠寒臺)라 명명했다. 그리고는 시를 지어 그 당시의 모습을 남겼다.

斷石臨溪勢欲騫(단석임계세욕건) 냇가 깎아지른 절벽 우뚝 서 있는 곳/ 披奇初得共欣然(피기초득공흔연) 경관 찾다가 얻고 나서 다 같이 기뻐하였네/ 試除荒棘開蒼壁(시제황극개창벽) 가시덩굴 제거하고 푸른 벽을 열고/ 規作平臺挹翠烟(규작평대읍취연) 평평한 대를 만들고 푸른 연기 감돌게 하였네(하략)

‘서원 일대 중 경관이 가장 빼어난 곳을 찾아보니 죽계천 냇가에 바위가 우뚝하게 서 있는데, 그 석벽 위에 덮힌 가시넝쿨을 베어내고 땅을 평평하게 골라 대(臺)를 만드니 푸른 연기(안개)가 감도는 것 같다’고 퇴계가 손수 시(詩)를 써 읊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재가 글씨를 새긴 경자바위 상단에 퇴계가 터를 닦고 작은 돌들을 쌓아 대(臺)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건물을 세운 것이 아니라 그냥 소박한 단(壇)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주변에다 소나무, 대나무, 잣나무를 심고 ‘翠寒臺(취한대)’라는 이름을 친히 붙였다. 사방이 툭 터진 야외교실을 마련한 것이다.

조선의 대표적 선비라는 퇴계는 대체 어떤 마음으로 선배인 주세붕 군수가 새긴 ‘敬자바위’ 위에다 감히 취한대를 마련했을까? ‘敬’자는 선비의 덕목을 대표적으로 나타낸 글자로 공경과 근신의 자세로 학업에 집중한다는 의미이다. 이와 더불어 안향을 공경하고 기리는 마음을 후대에 전한다는 뜻도 포함돼 있다.

취한대는 자연을 벗하며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곳이다. 이는 옛 구절 송취한계(松翠寒溪)에서 따온 것으로 ‘푸른 산의 기운과 시원한 물빛에 취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이 내포돼 있다. 그리고 퇴계는 ‘관동(冠童, 어린아이까지 포함)이 모여 시 읊기에 좋다’고 그 모임의 범위를 넓혀 줬다.

다시 곱씹어 보면, 선배 군수의 경자바위 글씨 위에다 단을 설치해 그 위에 올라앉게 하는 불경을 범하는 한이 있더라도 더 많은 유생과 관동들이 이곳에 모여 토론하면서 끝내 ‘敬’자의 깊은 의미를 절대로 잊지 말라는 더욱 엄중한 주문으로 풀이될 수 있어 보인다.

퇴계가 1549년에 조성한 취한대[壇]는 경자바위 그 자체를 일컫는다. 그보다 수십 보 아래쪽에 새로 지어진 정자 건물은 최근(1986년)에 신축한 것이다. 퇴계의 취한대와 직접적으로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건물인 셈이다. 퇴계가 취한대라는 단을 만든 지 437년이나 지나 깊은 고민 없이 취한대라는 정자를 신축한 것으로 보인다. 건물 이름을 ‘취한정’이라고만 붙였어도 혼란을 줄였을 터인데 굳이 ‘취한대’라고 같은 이름을 붙여 혼란의 가중을 초래하게 된 셈이다.

광풍대와 광풍정을 구분해 준 안내판처럼 취한대와 취한정을 구분해 줄 장치가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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