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은 사람의 신체 중에서 많이 쓰는 것이라서 그런지 손과 관련된 관용어가 많이 있다. ‘손이 크다’는 말은 신체의 크기만이 아니라 돈이나 양식 따위를 다룰 때 씀씀이가 커서 한 번에 많은 양을 꺼내어 쓴다는 의미도 있다. 일거리가 많아서 사람의 손이 필요하다든가, ‘이 일의 승패가 네 손에 달렸다, 장사꾼의 손에 놀아나서 그는 모든 재산을 날렸다.’ 등과 같이 손과 관련된 관용어를 찾아보면 끝이 없다. 아마 손이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관련 말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손은 단순한 도구 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사람은 자기와 처한 상황을 처음으로 눈을 통해서 인식하게 되지만 결국은 손을 통해서 최초로 만나게 된다. 윤동주 시인의 <쉽게 씌어진 시>에서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라는 표현이 나온다. 윤동주는 일제강점기라는 폭력적인 상황에서 시를 쉽게 쓰는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에게 눈물과 위안의 악수를 청한다. 그렇게 자신과 최초의 악수를 함으로써 폭압적인 시대를 마주하게 되었다. 악수가 아니었으면 그냥 상황은 지나갈 수밖에 없다.
루소는 <에밀>에서 아이들은 직접 손으로 만지고 경험함으로써 세상을 이해하고 사고력을 키울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를 요약하여 ‘인간은 손으로 생각한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사람은 먼저 손으로 만지면서 생각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며 궁극적으로는 손으로 인간의 문명을 창조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사람의 손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가는 데 가장 절실하게 사람들과 만나는 접점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여러 신체 중에서 중요한 의미를 띨 수밖에 없다.
사람은 손으로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손을 통해서 감정을 공유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마음이 통할 때 눈빛 다음으로 손을 잡고 사랑을 나눈다. 상대방이 아픔으로 휘청거릴 때는 두 손을 잡고 부축해 주면서 위로의 말을 건넨다. 그러니 손은 이성을 넘어서서 감정의 영역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어쩌면 손의 만남은 이성 이전에 감정이 먼저인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라.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잊을 수 없는 따듯한 손길이 얼마나 많이 지나갔는지, 그리운 손길이 얼마나 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는지 모른다.
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은 누가 뭐래도 봉사의 손길이다. 봉사의 손길은 감정과 이성은 물론이요, 철학적인 의미를 넘어서는 실천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영주에도 우리가 알게 모르게 수많은 봉사의 손길이 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대가를 바라지도 않고 그들은 봉사의 손길을 여지없이 내민다. 손수 짜장면을 만들어서 시설 전체 어르신들에게 제공하는가 하면 복지 시설에서 자신의 시간을 희생하여 봉사의 손길을 나눈다. 계절을 마다하지 않고 그들은 따듯한 손길을 나눈다. 특히 그들은 계산하지 않는다.
손세실리아의 시가 있다. 엄마 소는 ‘새끼 몇 배 낳아 젓 빨리다 보니/ 몸피는 밭아 야위고 육질은 질겨져/ 고깃값이 황소 절반밖에 안 되고/ 뼈도 구멍이 숭숭 뚫려 우러날 게 없단다’라고 했다. 엄마 소는 자신의 모든 것을 새끼에게 주어 뼈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서 고기도 질기고 뼈도 구멍이 뚫려서 값이 절반에도 못 미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도 나이가 드신 분들이 골다공증도 생기고 관절염도 앓게 되는 것이다. 이 숭숭 뚫린 구멍을 과연 우리는 무엇으로 메울 수가 있을까. 과연 돈으로 메꿔질 수 있을까.
우리 사회의 숭숭 구멍 난 곳을 메워 주는 역할을 하는 분들이 바로 봉사의 손길들이다. 이 손길이 없으면 이 사회의 구멍은 아무도 메꿀 수가 없다. 보편적인 복지로 이 구멍을 메꿀 수도 없고 공무원들의 어떤 노력으로도 이 구멍만은 메꿀 수가 없다. 정치로는 더더욱 어렵고 종교도 이런 구멍은 쉽사리 메꾸기는 어렵다. 손길만이, 오직 봉사하는 아름다운 손길만이 이 구멍을 메워서 그래도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 수가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