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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중의 영주 톺아보기 [159] 불에 관한 몽상

2025. 04. 04 by 영주시민신문

우리에게 불은 그렇게 무서운 존재가 아니었다. 늘 우리 곁에서 따뜻함을 주는 그런 친근감 있는 것이었다. 이런 불에 관한 생각이 이번 북부 지역을 휩쓴 산불로 인해서 사라졌다. 이번 산불은 인명과 재산뿐만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 갔다. 비록 영주까지 밀려 들어오지는 않았으나 공포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어디에 가서 ‘우리는 다행히 별 탈이 없으니 걱정하지마.’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아프다.

불은 늘 우리 곁에 있었다. 따듯한 겨울을 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불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우리 지역에서는 잘 발견되지는 않으나 강원도 지역에는 화티라는 게 있었다. 화티는 불씨를 보관하기 위해서 만든 용구로 부뚜막 옆에 진흙으로 만들어 놓은 일종의 화로로 장작을 때고 난 뒤에 불씨를 모아두는 곳이었다. 옛날에는 이 불씨를 꺼뜨리면 그 집안이 망한다고 하여 며느리를 쫓아냈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 프로메테우스 신화가 나온다. 인류에게 불을 빼앗은 제우스 신을 속이고 꺼지지 않는 불을 인간에게 몰래 준 대가로 제우스에게 끔찍한 형벌을 받게 된다. 프로메테우스의 결단으로 인해서 인간은 신에게서 자유롭게 되었고, 불을 사용하여 문명을 창조할 수 있었다. 불이 있었기에 인간은 돌을 깨고 돌을 갈아서 도구로 사용하다가 드디어 돌을 녹여서 청동도 만들고 쇠를 만들 수 있었다.

물, 공기, 흙과 함께 불을 만물의 근원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다. 그는 이 네 가지 원소가 변화와 변형을 통해서 모든 것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원소들이 서로 합쳐지고 결합하면 사랑이 되고 분리되고 서로 멀어지면 혐오가 되는데, 만물의 변화가 사랑과 혐오의 상반된 힘에 의해 일어난다고 보았다. 물과 불의 상반된 힘을 다시 한번 느낄 수가 있어서 고개가 끄덕여진다.

가스통 바쉴라르는 말했다. “나는 꿈꾼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바쉴라르의 저서 <불의 정신>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는 불을 바라보거나 촛불을 바라보면 어느덧 멍하니 무의식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러고 보면 어릴 때 사랑방에 군불을 때면서 나도 모르게 생각 속으로 빠져 들어간 적이 종종 있었다. 그렇게 불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꿈을 꾸고 그제서야 우리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생각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꿈꾸면서 존재하게 된다.

화티에서 재로 점점 변해가는 불씨를 보면서 그 옛날 누군가는 몽상에 빠졌다. 프로메테우스가 우리에게 불을 주어 문명을 창조하는 데는 우리 인간의 엄청난 상상력이 필요했다. 만물의 근원인 불을 보면서 인간은 사유했기에 아테네 철학이 완성될 수 있었다. 바쉴라르는 불을 바라보면서 꿈을 꾸면서 드디어 자신이 존재함을 깨달았다. 몽상의 힘은 무모한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금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창조적인 열매를 맺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에 대한 몽상이 이번 우리 지역 산불로 인해서 산산조각이 났다. 산불은 엄청난 현실이었으며 우리의 목숨을 위협했다. 위태로움이 이렇게까지 가까이에 있을 줄은 지금까지는 알지 못했다. 불덩이가 산등성이를 넘어 다니고 강을 건너는 광경을 보면서 우리는 망연자실했다. 불덩이가 도로를 달리는 차에 떨어지면 차가 불타고 화기가 지나가기만 해도 집은 그대로 재로 변했다. 거기에다가 앞이 보이지 않는 매캐한 연기도 공포 그 자체였다.

산불이 모든 것을 삼킬 듯이 타오르던 날 정말 가랑비랄 수도 없는 적은 양의 비가 내렸다. 빗줄기가 굵지도 않았고 세차게 내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의 속이 타들어 갈 정도의 갈급한 비였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것을 태울 것 같았던 산불이 그 비에 주춤하면서 그날 주불이 진화되었다. 물론 산불 진화용 헬기나 소방대원, 산불 진화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신 분들의 사투가 있었다. 그날 극적으로 산불은 진화됐다. 불에 대한 몽상은 산산조각이 났으나 물과 불의 대립이 세상을 살렸다. 가장 현실적인 것이 가장 위대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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