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308] 금성대군과 정축지변의 순흥(順興) <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 오피니언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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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확대경

배용호(前 영주교육장)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308] 금성대군과 정축지변의 순흥(順興)

2025. 04. 04 by 영주시민신문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 1426~1457)는 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섯째 아들이다. 일찍이 성균관에서 학문을 닦아 당대 문장가로서도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아버지 세종대왕은 그를 총애하여 아예 그의 집에 거처하기도 했다. 아버지 세종과 세자 문종이 함께 궁궐을 비울 때는 세손 단종을 금성대군에게 맡긴 적도 몇 차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이 승하하고 대를 이은 큰 형 문종이 명이 짧아 1452년에 장조카인 단종이 즉위하게 되자 단종을 신명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것이 친형 수양대군과 반감의 시작이었다. 소위 야심만만한 실권자 수양대군 쪽에서 보면 단단히 박힌 미운털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금성대군의 집에서 ‘왕족들의 활쏘기 시합’이 있었는데 이 단순한 놀이를 구실로 탄핵하여 직첩을 박탈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처럼 금성대군의 단종 보필 약속은 순탄치가 않았다.

결국은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발단시켜 단종을 보호하려는 왕실 세력을 모두 제거하였다. 금성대군이 더욱 강하게 반발하자 반란을 꾀하였다는 모략으로 신분을 박탈하고 경기도 삭녕(朔寧, 연천)에 유배시켰다가 다시 경기도 광주(廣州)로 이배하였다. 이후에도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었다 하여 다시 순흥부에 안치되었고 재산, 노비는 모두 몰수당했다.

금성대군의 순흥 처음 유배지가 패도(貝島)였다고 한다. 합도(蛤島)라고도 부른다. 조개 ‘貝’자, 큰 조개 ‘蛤’자이니 결국은 ‘조개섬’이다. 산등성이에서 본 마을 형세가 조개처럼 보인다고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마을을 상징하려는 듯 마을 앞 논 가운데에는 조그만 섬 모양의 둔덕이 있는데, 예전에는 수백 년 되는 느티나무가 있었고 마을 동제를 지내는 서낭당도 있었다고 한다. 병자년(1876) 대수해로 섬이 유실되면서 동네가 흉·재가 그치지 않아 동민들이 섬을 복원하였는데 이때도 규모가 많이 줄었으며, 이후에도 유실, 복원을 반복하면서 몸무게가 점점 줄어들어 지금처럼 볼품없게 되었고 급기야 ‘조개 섬이야’하는 비아냥까지 듣게 된 것으로 보인다.

순흥은 어머니(소헌왕후) 외가가 있었던 곳이다. 모반으로 몰아진 죄인을 어머니의 연고지에 유배 보낸다는 비난을 잠재우려 일부러 ‘조개섬’이라는 마을을 택해 섬에 귀양 보내는 효과를 보이려는 절묘한 선택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순흥에 유배된 금성대군은 이보흠(李甫欽) 순흥부사와 의기 상통하였고 이곳 호족(豪族)이던 순흥안씨와 내통하여 단종복위 거사를 획책하다가 탄로되어 관군에 의해 순흥부가 쑥대밭이 되었다. 이른바 정축지변이다. 부(府)는 혁파되고 관아와 집들이 모두 불탔으며,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해 죽계를 피로 물들였다. 사방 10리 이내 주민들은 닥치는 대로 사살되어 그 피가 죽계천 십리를 흘렀다고 한다.

그 핏물 끝이 하필이면 ‘조개섬’ 부근의 「피끈」 마을이라는 점도 조금은 아이러니하다. 이후 순흥안씨는 멸족되다시피 하여 현재도 순흥은 순흥안씨가 살지 않는 명목상의 관향지로만 남아 있다. 금성대군도 이때 사사(賜死)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때가 1457년(세조 3) 음력 10월 21일로, 그의 나이 혈기왕성한 32세였다. 원래 사약은 마시기 전에 임금이 계신 한양을 향해 절을 해야 하는데, 금성대군은 “내 임금은 북쪽에 계신다”며 단종이 있는 영월을 향해 절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금성대군은 사후에 유배지 순흥지역에서 소백산 산신령으로 신격화되었다. 당대의 순흥이 단종복위운동을 획책할 정도로 지지도가 강했던 것과 무속 특유의 신격화 문화가 이 같은 금성대군 신앙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순흥에는 금성대군 신단이 있고, 대군의 혈석(血石)을 모신 두레골 서낭당도 있다. 또한, 고치령 산령각에는 단종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이는 조선의 왕족을 인신(人神)으로 모신 굉장히 드문 사례로서 높은 가치를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초암사에 봉안돼 있다가 흑석사로 모셔진 국보 아미타여래좌상은 금성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효령대군, 정의공주 등의 시주를 받아 후궁 의빈 권씨가 조성했다는 최근 연구발표가 있어 감흥이다. 의빈 권씨는 일찍 서거한 소헌왕후를 대신하여 금성대군을 친자식처럼 보살폈던 후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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