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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확대경

배용호(前 영주교육장)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306] 소수서원의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

2025. 03. 07 by 영주시민신문

소수서원의 직방재와 일신재는 명륜당(明倫堂)에 가장 가까이 있는 건물이다. 동향인 명륜당에서는 왼편 건물인 셈이다. 동서로 길쭉하게 놓여 있는데, 왼쪽(서편)은 직방재, 오른쪽(동편)은 일신재 현판을 각각 달고 있다. 원래 두 개의 건물로 나눠 있었던 모양이다. 일반적인 향교나 서원의 체계를 보면 주전 건물을 중심으로 그 앞에 동·서 건물이 양편에 위치하는 것이 정형이다.

그러나 소수서원의 경우 동쪽을 바라보는 명륜당 앞에 직방재와 일신재가 따로따로 설치되면 우측 건물로 인해 수려하게 배치된 경렴정과 은행나무 경관이 가려지게 된다. 이런 점이 고려되어 명륜당 우측에는 건물을 배치하지 않고 동·서재를 한쪽으로 몰아붙인 독특한 구조를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그리고 크기와 모양이 흡사한 두 건물을 한쪽에 붙여 세우다 보니 여러 중수를 거치는 동안 하나의 건물로 합쳐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어떻든 직방재와 일신재는 명륜당 휘하의 가장 가까운 건물이다. 가깝다는 말은 그만큼 중요한 건물이란 의미가 될 수도 있다. 하학상달(下學上達)이라는 학문의 차례와 단계로 본다면 서원의 핵심인 명륜당을 중심으로 가장 먼 담장 밖에는 탁청지(濯淸池), 앙고대(仰高臺) 등의 부속 시설이 설치되고, 담장 안쪽으로 들어와서도 독서를 통해 학문의 즐거움을 가진다는 지락재에서 시작해,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본격적으로 구하는 학구재, 그다음에 날마다 새롭게 자신을 추스르는 일신재, 그리고 항상 깨어 있는 마음을 곧게 갖춘다는 직방재로 이어지게 되고 그다음에 명륜당에 들게 된다는 일련의 구조이다.

「명륜(明倫)」이란 ‘인간 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이며, 이런 거대한 목표를 추구하려는 명륜당은 당연히 서원의 중심으로 앉게 된다. 그리고 명륜당보다는 한 단계 낮지만, 유생들의 거처인 지락재(至樂齋), 학구재(學求齋)보다는 상위 단계에 있는 건물이 이른바 직방재와 일신재인 것이다. 이들 건물은 모두 명륜당보다는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 있고, 건물의 높이와 규모도 조금씩 낮고 작게 조성되여 위계를 거스르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각 건축물의 질서는 학문의 차례와 단계를 뜻하며, 뒤 물림, 단 낮춤 등은 모두 사제 간의 예의를 함께 표현하는 것이다.

직방재는 원장 및 임원실이고, 일신재는 일반 교수들의 거처이며, 뒤에 있는 학구재가 상급 유생, 그리고 지락재는 갓 들어온 신참 유생들의 기숙사가 되는 이유이다. 직방재(直方齋)의 ‘직방’은 『주역』의 “군자는 경(敬)으로 내심을 바로잡고 의(義)로써 밖으로의 행위를 바로잡는다” [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군자경의직내 의이방외)] 따서 지은 이름이다.

즉, <항상 자신의 몸가짐과 언행을 성찰하라>는 속뜻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곧고 바름을 상징하는 것이 ‘직방’이라면, 이를 옳게 행하지 못한것을 ‘건방’이라고 하는 것이다. 「直方齋」 현판은 오랫동안 방 안벽에 종이로 오래 붙여져 있던 퇴계 선생의 글씨를 모각(模刻)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신재(日新齋)는 애당초부터 독립 건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직방재에 붙여 하나의 방으로 지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소수서원 원장이었던 성언근(成彦根)이 직방재 옆의 신방(新房)을 증축하고 난 뒤 ‘新房’이라는 글자 앞에 ‘日’자를 추가하고 ‘房’을 ‘齋’로 바꾸어 「日新齋」라는 현판을 걸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대학』에 나오는 구절인〔苟日新 日日新 又日新(구일신 일일신 우일신)〕 “진실로 하루를 새롭게 하고,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한다”라는 말이다. 즉, <인격도야가 나날이 새로워져라>라는 의미를 지닌 현판이다.

직방재와 일신재가 지금은 이어진 하나의 건물로 되어 있으나, 원래는 각각 독립된 건물이었던 모양이다. 성언근이 쓴 「일신재기」에서도 보이듯이 직방재 옆에 딸린 작은 서재이던 신방이 증축할 때마다 나날이 일신되면서 직방재와 동일한 규모가 되었다고 하며, 일제강점기가 남긴 흑백사진에서도 두 건물이 각각 분리되어 있었던 흔적을 확인할 수가 있다. 외형만 이어져 있지 아직도 툇마루와 난간은 연결되지 않았으며, 그래서 현판을 각각 따로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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