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304] 남사고(南師古)와 영주 인연 <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 오피니언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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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확대경

배용호 (전 영주교육장)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304] 남사고(南師古)와 영주 인연

2025. 02. 07 by 영주시민신문

격암(格庵) 남사고(南師古, 1509~1571)는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 출생으로 조선의 대표적인 예언가이자 천문관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출현을 예언하기도 했으며, 특히 조정의 천문 교수 재직 시 울진에 있는 본가의 화재를 예언하기도 했다.

또, 한반도를 호랑이 형상으로 보아 백두산은 코, 포항 호미곶은 꼬리[虎尾]에 해당한다고 하여 지금의 ‘호미곶’이 되었다. 사람들은 남사고를 기인(奇人)으로만 보는 경향인데, 실제로는 술수가 아니라 오랜 학업과 연구, 현실 정세를 관찰한 유학자의 판단이라고 후손들은 전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그에 대한 기록은 여러 문헌에 남아 있다. 그중 우리 지역 관련 내용을 보면,

① 남사고의 예언

그가 영주 쪽에 있을 때는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댁을 자주 찾았다. 하루는 소고의 아들 박록(朴漉)과 같이 소백산에 올랐다가 동남간에 이상한 기운이 서려 있다며 한동안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록에게 말했다.

“辰년과 巳년 중에 섬나라 오랑캐가 난을 일으켜 임금이 궁을 떠나 피난을 해야 할 액운이 있다. 그러나 소백산 아래 풍기와 영주 사이에는 병화가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미 죽어서 보지 못하겠지만…” 과연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나 조선 강토가 병화에 휩싸였다. 그런데 그가 제시한 십승지는 모두 전란을 피했다. 전란 중에도 왜구들은 죽령이 아니라 조령을 넘나들었다.

소백산의 천석(泉石)은 모두 낮고 평평한 골 안에 있고, 산허리 이상에는 돌이 없는 까닭에 산이 웅장하여도 살기(殺氣)가 적다. 먼 데서 보면 묏부리가 솟지 않고 엉기어 있는 듯하다. 구름 가듯 하늘에 닿아 북쪽을 막았고, 때로는 흰구름이 그 위에 뜨기도 한다. 이쯤에서 남사고는 갑자기 말에서 내려 소백산 쪽으로 넙죽 절을 하고는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라고 외쳤다.

그가 말한 십승지는 모두 남한 지역에 해당하며, 특히 소백산 일대에 그 절반(풍기 금계동, 봉화 춘양, 예천 금당실, 상주 우복동, 영월 정동 상류)이 집중분포 해 있다.

② 남사고의 에피소드

소수서원 『입원록(入院錄)』에 「남사고 복초 울진」이라는 기록이 확인된다. 울진 출신 남사고가 소수서원에서 유생 즉 정식 학문의 길을 걸은 것이다. 퇴계보다 8년 아래다.

그가 소수서원에서 공부할 때 동료들을 생각하여 인근 유지의 명당자리를 잡아 주고 사례 음식물을 챙겨 유생들과 나누었는데, 이 사실을 안 퇴계가 “가난한 유생을 긍휼(矜恤)하는 것은 대견한 일이나 복은 마음을 닦을 때 생겨나는 법”이라고 일침을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수차례 향시에는 합격했으나 대과에는 끝내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나중에 종6품 관상감 천문 교수로 발탁되었다가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③ 남사고의 전설

봉화 상운 반송마을의 뱀재는 지형이 구불구불한 뱀 형상이다. 남사고가 어둑한 죽령에서 상운 쪽을 내다보니 강물이 굽이치고 그 옆에 아홉 용이 구슬을 다투는[九龍爭珠] 명산이 눈에 들어왔다. 급히 어머니 묘를 이장하던 중 난데없이 초립둥이가 나타나 “남사귀야 남사귀야 천하명풍 남사귀야 명당자리 어데두고 구천십장 복중절사 웬말이냐”하며 놀리듯 선소리를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남사고가 깜짝 놀라 자세히 살펴보니 그곳은 구룡쟁주가 아니라 개구리 한 마리를 두고 다섯 뱀이 다투는[五蛇葬] 천하의 흉지였다. 남사고와 그의 말은 그 자리에 즉사했다고 한다. 지금도 반송마을 남산골에는 남사고 모친 묘소라고 전하는 묘소가 반송마을 남산골에 방치된 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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