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머지 공부라는 말이 있었다. 주로 받아쓰기와 산수에서 낮은 점수를 받으면 학교에 남아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요즘에는 방과후에 부족한 학습을 보충한다고 해서 그렇게 거부감 있는 말은 아니지만 나머지 공부는 달랐다. 어쨌든 나머지 공부에 걸리는 날이면 긴긴 오후 시간을 어떻게 교실에 붙잡혀 있을까 하는 불편한 마음에 무척 속이 상했었다.
나머지 공부를 하고 운동장에 서면 해가 꽤나 기울어져 있어 서편에 있던 미루나무 그림자가 길게 동쪽 끝에 닿아 있었다. 친구들은 이미 소 풀을 뜯으러 갔다가 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논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마음이 왜 그렇게 눈물겨웠는지 모른다. 공부를 보충했다는 마음보다는 친구들과 같이 놀지 못했다는 생각에 어깨가 축 처졌었다.
나머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나머지는 왜 나누기에만 있을까, 나누니까 나머지가 있겠지. 더하기나 곱하기는 나머지가 없다. 더하기나 곱하기는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서 괜히 기분이 좋았다. 뺄셈도 나누기가 없다. 빼고 나면 점점 가진 것이 없어지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더하기나 곱하기, 빼기는 좀 매력이 덜했다.
나머지는 나누기에만 있어서 왠지 나누기가 좋았다. 계산을 하기에는 제일 어려운 산수였지만 뭔가 남아서 좋았다. 나누면 자꾸 없어질 것 같았는데 나누기에는 늘 나머지가 있어서 뭔가 작은 기쁨이 있었다. 그래서 어른들은 사람들과 무엇이라도 나누라고 말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딱 떨어지는 나누기, 4 나누기 2와 같은 나누기는 나머지가 없어 재미가 없었다.
중도(中道)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으로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바른길이라는 뜻이다. 원래는 불교에서 나온 용어로 양극단을 떠난 올바른 길로서 어느 한 극단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쾌락과 고행의 두 극단을 떠나서 심신의 조화를 얻는 중도에 설 때 비로소 진실한 깨달음의 도가 있다는 것이다.
쌍차쌍조(雙遮雙照)는 불교에서 사용하는데 양극단을 버리고 서로 비춘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쌍차는 두 가지를 막는다는 뜻으로 모든 대립적인 개념을 부정하거나 초월함을 의미한다. 쌍조는 두 가지를 비춘다는 뜻으로 단순히 극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개념이 본래 하나임을 깨닫고 이를 있는 그대로 비춘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양극단을 융합한다.
불교 경전에 있는 대화의 내용이다. 한 제자가 중도의 뜻을 물으니, 가장자리가 곧 중도라고 대답했다. 제자는 어떻게 가운데[中]가 가장자리[邊]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스승이 대답하기를 가장자리는 가운데로 인해서 있을 수 있고 가운데는 가장자리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가운데가 없는 가장자리가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요즘에는 중도가 점점 없어지고 있다. 오른쪽과 왼쪽의 세력이 너무나 강하게 형성되어 중도가 설 땅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 내가 중도임을 잘못 말하다가는 양쪽에서 공격을 동시에 받아 낭패당하는 일까지도 있다. 물론 양쪽이 다 틀렸다는 양비론이나 양쪽이 다 맞다는 양시론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그렇게 해서는 세상 삶은 역동성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중도는 나머지 공부를 하는 사람과 비슷하다. 나머지 공부를 열심히 하다가 보면 한두 명씩 나머지 교실에서 떠나고 몇 명만 남아서 운동장의 기울어져 가는 그림자를 보듯이 중도는 쓸쓸하다. 대부분 사람이 오른쪽과 왼쪽으로 떠나가고 중도에는 몇 사람만 남아 서성이면서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나머지가 없는 사회는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다양하고 복잡해서 영(0)으로 딱 맞아떨어지는 사회가 아니다. 남기도 하고 모자라기도 해서 남으면 주고 모자라면 얻어오면서 복잡한 경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머지 공부도 하고 빨리 집에도 가는 것이다. 이쪽저쪽으로 완벽하게 나누어서 살아가는 세상은 건강한 세상이 아니다. 아니,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바른길이 아니다. 그러니 중도는 나머지가 아니라 스스로 남은 사람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