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303] 소수서원 학구재(學求齋) <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 오피니언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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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확대경

배용호 (전 영주교육장)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303] 소수서원 학구재(學求齋)

2025. 01. 23 by 영주시민신문

학구재(學求齋)는 소수서원 중심 건물인 명륜당(明倫堂) 뒤쪽에 백 댄서처럼 일렬로 늘어선 건물 중 끝에서 두 번째 있는 건물이다. 늘어선 열 중에서도 살짝 뒤쪽으로 한걸음 물러서는 겸손을 보이고 있는데,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학문을 탐구하던 곳으로, 요즘 말로 치면 기숙형 학교 정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원래의 건물명은 ‘어린아이들이 공부하는 공간’이라는 뜻으로 동몽재(童蒙齋)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학구재로 바꾸었다.

『소수서원 잡록』에 「어린 학동이 기숙하는 제도가 이미 없어진 지 오래되었으므로 모두 편액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에 주부자(朱夫子, 朱子의 존칭)의 글씨 ‘學求’라는 두 글자를 본뜨고 지락재의 ‘齋’ 자를 본떠 합쳐 ‘學求齋’라는 현판을 만들어 걸었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아마도 서원 교육이 글을 처음 배우기 시작하는 학동 중심에서 학문을 탐구하는 유생 중심으로 진화된 듯하다.

‘學求’는 「학구성현(學求聖賢)」에서 나온 말로 ‘성현의 가르침을 따라 학문을 깊이 연구한다’는 뜻이며, ‘聖賢’이라 함은, 성인과 현인을 아우르는 말이다. 이 글귀는 소수서원에 걸려 있던 현판의 글인데, 중국 남송의 유학자 주희(朱熹, 朱子, 호 晦庵) 글씨의 모각(模刻)이란다.

편액 「學求聖賢(학구성현) 鳶飛魚躍(연비어약)」이라는 죽계지에 실린 주희의 글씨를 모각한 것으로 보이는데, ‘성현의 가르침을 얻어 학문을 연구하며, 새가 날고 물고기가 뛰어 논다’는 뜻으로 새가 하늘을 날고 물고기가 물에서 노니는 것은 천지자연의 질서에 따라 각자의 공간에서 자유롭게 역할을 수행하는 세상, 즉 자연의 순리대로 잘 이루어지는 태평성대를 표현한 글귀라고 한다. 그러니 ‘학구재’는 태평한 세상에서 마음 편하게 학문을 연구하는 전당이라는 배경이 담겨 있는 건물인 셈이다.

독서의 즐거움을 익히는 기초 단계를 지나면 학문을 구하는 다음 단계로 들어서게 되는데, 이에 따른 지락재‧학구재 등의 건물 배치는 하학상달(下學上達), 이를테면 낮고 쉬운 것부터 배워 깊고 어려운 것을 깨닫게 하는 절차 즉, 학문의 차례와 단계를 뜻하는 것이므로 독서를 통한 학문의 즐거움을 의미하는 지락재를 시작으로,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구하는 학구재, 날마다 날마다 새롭게 한다는 일신재, 그리고 깨어 있는 마음을 곧게 정리한다는 직방재 순으로 배치되어 단계를 설명하고 있다. 이 직방재에 이르면 학문을 크게 이루게 되므로 비로소 명륜당(明倫堂)이라 불리는 강학당에 들어 세상의 이치를 밝히게 된다고 한다.

소수서원 원장을 지낸 성언근(成彦根)의 『일신재기』에도 “대개 학자의 공부는 마땅히 독서가 우선이기 때문에 지락재가 맨 아래 있고, 독서를 하여 성현과 같이 되기를 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학구재가 그 왼쪽에 있고…” 이렇게 건물을 배치하였다는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 학구재는 교수들의 숙소인 직방재·일신재보다 조금 낮게 그리고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기 위해 뒷물림하였고, 유생 숙소로서는 지락재보다 조금 높여 상급 유생의 지위를 지켜 주었다.

숙소 모양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지극히 소박하다. 특히 학문의 숫자인 3을 상징하여 세 칸으로 꾸몄고, 공부를 잘하라는 뜻으로 건물 입면이 마루를 중간에 두고 방을 양쪽에 배치하여 ‘工’ 자 형이 되도록 설계하였다. 숫자 3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 최초의 완성된 숫자로 여긴다. 삼박자, 삼세판, 만세삼창 등 우리 민족의 정서에도 부합하는 숫자 3을 택해 안정되고 편안한 학문 탐구를 바라는 유림의 뜻을 반영하였다.

여러 기록을 참고해 보면, 학구재의 전신이 동몽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몽재는 3칸 건물로 애당초 경렴정과 지락재 사이쯤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순흥부가 복설되기 전인 정사년 전후에 지락재 북쪽 가로 옮겨 세웠다니 지금의 유물관쯤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동쪽 담장 구석에 치우친 느낌이고 방이 비좁고 인적이 드문데다 여러 해 비어 있어 태반이 퇴락되었으므로 지락재와 신방(新房, 일신재) 사이로 앞당겨 남향으로 터를 잡고 새로 재목을 마련하여 이건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현재 학구재 마루 위에 「동몽재상량문(童蒙齋上梁文)」이 걸려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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