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톺아보기를 쓴 지 벌써 3년이 지나고 4년에 접어들었다. 영주를 자세히 살피면서 영주의 모습을 다시 한번 새롭게 바라보면서 영주의 사상(事象)이나 영주 사람들의 생각, 삶의 모습이나 생활 문화 등, 영주에 일어나는 많은 일에 관심을 가지고 샅샅이 살펴보는 글을 쓰기로 한 지가 어제 같다. 과연 처음에 마음먹은 대로 글을 썼는가 하고 뒤돌아보면서 반문해 보니 부끄럽기가 그지없다.
처음 톺아보기를 쓸 때 이렇게 글을 마무리했다. “이제는 고개를 숙이고만 있을 일이 아니라 이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 아픈 통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 한마디라도 혈액 속에서 건져 올려서 쓸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을 시작할 때만 해도 코로나로 인해서 모든 분이 말로 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 시대나 힘겹고 아픈 통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위로의 말은 언제 어느 때도 우리 곁에 있어야 할 말인 것은 분명하다.
‘복분(覆盆)’이라는 말이 있다. 주석에는 복분을 ‘햇빛도 엎어놓은 물동이 아래를 비추지 못한다. 훗날에 와서 사회적으로 그늘진 곳이나 침울하고 원통함을 하소연할 곳이 없음을 비유하는 말(謂陽光照不到覆盆之下 後因以喻社會黑暗或無處申訴的沉冤)’로 풀이하고 있다. 엎어놓은 물동이란 뜻을 가졌으니 비유하여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이나 소외된 곳으로 풀어도 무방할 것 같다. 엎어놓은 물동이라 햇빛이 들어갈 여지가 없어서 어둡고 습하며 외롭고 쓸쓸한 곳이라고 풀이해도 되겠다.
고전시가 중에 ‘갑민가(甲民歌)’가 있다. 그중에 ‘나라님께 아뢰자니 구중천문(九重天門) 멀어 있고/ 요순 같은 우리 임금 일월같이 밝으신들/ 불첨성화(不沾聖化) 이 갑산에 복분하(覆盆下)라 비칠소냐.’ 함경도의 갑산(甲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험한 산골로 사람이 가장 살기 힘든 유배지를 말하며, 갑민은 갑산에 살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 어쩌면 유배지로 가장 소외된 지역인 갑산을 복분(覆盆) 즉 엎어놓은 물동이로 비유하고 있으니, 옛사람들이 쓴 복분이라는 말뜻을 알 듯도 하다.
지금 우리는 엎어놓은 물동이와 같은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계엄과 탄핵, 탄핵 찬성과 반대가 뒤엉켜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는 국면을 지나가고 있다. 극명하게 양쪽으로 갈려서 공통분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대립과 반목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저께는 안타까운 참사로 많은 인명 피해와 함께 우리 국민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안겨 주었다. 뭐 하나라도 순리대로 물 흐르듯이 흘러갈 형국은 아닌 것 같다. 정말이지 햇빛 하나 비추지 않는 엎어놓은 물동이 속과 같은 현실이다.
그렇다고 엎어놓은 물동이를 깨트릴 수는 없다. 그 물동이가 민주주의든지 법이든지, 아니면 제도나 규범이라고 할지라도 물동이를 깨뜨리고 나면 돌이킬 수가 없다. 그러니 어떡하든지 엎어놓은 물동이를 깨뜨리지 말고 조심스럽게 다시 엎어서 빛을 비추어야 한다. 엎어놓은 물동이에 빛을 비추는 것을 光照覆盆(광조복분)이라고 한다. 소외되고 어둡고 습한 물동이 안을 비추려면 그냥 둬서 될 일이 아니라 우리 힘으로 몰동이를 들어서 빛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영주톺아보기를 光照覆盆(광조복분)의 심정으로 쓸려고 한다. 구석진 곳, 외진 곳, 뒤쪽의 그늘진 곳을 찾아다니며 지금까지는 별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곳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빛을 비추는 것과 같은 것이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빛을 비추다 보면 구석진 곳이 조금씩 밝아지지 않을까 하는 낭만적인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보면 어느덧 이 답답한 세상도 조금씩 제 자리를 찾아갈 것이고 나름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