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298] 조선 선비의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 <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 오피니언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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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확대경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298] 조선 선비의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

2024. 12. 06 by 영주시민신문

1999년에 봉화 바래미 마을 청하댁 건물이 도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수리하던 중 고방(庫房) 독(단지) 안에 먼지 뭉텅이 책이 한 권 발견되었다. 거름더미에 던지려다가 자세히 살펴보니 놀랍게도 역사상 최초의 「영남만인소」를 기록한 『壬子日錄(임자일록)』이었다. 청하 현감을 지낸 이 마을의 김희택(金熙澤)이 닭실의 삼계서원 발의에서부터 만인소가 끝날 때까지의 일을 소상하게 기록한 일기였다. 그는 「영남만인소」에 공사원(公事員)으로 참여한 사람이었다. 이 책을 청량산박물관이 2023년 11월 국역하였다.

상소(上疏)는 ‘임금에게 올리던 글’이다. 조선의 문무백관에서 평민까지 누구나 올릴 수 있던 소청제도였다. 나름 엄격한 규칙과 절차를 가지고 운영된 이른바 ‘국민청원’이었다. 혼자 올리면 ‘일인소’, 백명이 같이 올리면 ‘백인소’가 되고, 만명이 연명하면 ‘만인소(萬人疏)’가 되었다. 하지만, 사도세자 복권 상소로 말미암아 이미 법전 시드물의 멸문지화 사례도 있어 무턱대고 상소하기도 쉽지 않은 상태였다.

1만 명이 서명한 ‘만인소’는 만(萬) 사람의 소청이니 ‘곧 만천하의 뜻’이라는 말이 된다. 당시 조선의 인구, 통신 수단을 감안한다면, 실로 엄청난 집단상소라고 할 수 있다. 전대미문의 사건이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만인소」가 조선 후기에만 일곱 차례나 행해졌다. 그 일곱 차례가 거의 영남 유림에 의한 것이어서 이를 특별히 「영남만인소」라고 부르게 되었다.

‘소두(疏頭)’라는 상소의 우두머리는 주로 벼슬에 나서지 않은 은둔 선비들이 맡았다. 총 7차례 ‘만인소’ 중 3차, 7차 상소문 원본이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총길이가 100m, 무게는 30kg에 육박한다. 한국국학진흥원이 기탁된 실물을 확인하기 위해 펼쳤을 때, 안동대 체육관을 두 번 왕복하고도 남았다고 한다. 두루마리 한지 130여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장마다 80명씩의 수결(手決)이 정연하게 찍혀 있었다.

최초의 만인소는 1792년(정조 16)에 올려진다. 이를 「1차 영남만인소」라고 부르는데, 사도세자 복권을 주청하는 내용이다. 면암(俛庵) 이우(李㙖)를 소두로 경상도 유생 10,057인이 올린 상소문을 받고 정조가 감격한 나머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고 전한다.

「1차 영남만인소」는 이 지역 출신 성균관 유생의 통지문으로 시작되었다. 통지문을 받은 삼계서원의 김한동(金翰東)이 70여 명의 긴급 유림회의를 주제했고, 즉각 각 서원과 향교 등에 통문(通文)을 보내 영남 225개 문중의 1만여 명 유림을 단번에 결집시킨 것이다. 실로 놀랄만한 조직력임을 알 수 있다.

「1차 영남만인소」 명부는 『승정원일기』에 수록돼 있다. 문중별로는 경북이 153개 문중으로 중심을 이룬다. 이 중 안동(예안 포함)이 20개, 상주가 16개, 영주가 11개 문중이다. 이후 나라가 어려울 적마다 유림들은 만인소로 뜻을 밝혔고, 특히 개화기 ‘척사 만인소’는 곧바로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당시 사도세자의 스승이었던 평암(平庵) 권정침(權正沈)의 일기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있다>

영조가 휘녕전(세자궁) 안의 모든 신하와 궁관을 쫓아냈지만, 권정침은 “이런 대사변에 사관이 어찌 잠시라도 현장을 떠날 수 있겠는가?”라며 나가지 않았다. 세자가 숨을 몰아쉬면서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자 내의를 불러 약을 올리게 했다. 영조가 불같이 화를 내며 권정침을 사형에 명했다가 삼경에 이르자 중지시켰다. 그래도 그는 세자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세자가 세손(정조)을 보고 싶다고 하여 세손을 데려왔다. 그리고 나서는 궐문 밖으로 쫓겨났다. 다시 들어가려 했으나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문밖에서 며칠을 버티다가 실신하여 사람들에게 들려 나왔다. 그사이 세자는 뒤주 안에서 죽었다. 권정침은 고향(봉화)으로 돌아와 두문불출했다. 겨울에도 방에 불을 때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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