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하면 입영 전야가 떠오른다. 아마 우리나라 남자들 대부분이 논산훈련소를 다녀왔을 것이다. 영주역에서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입영 열차를 타고 산굽이를 돌자마자 쌍소리를 들으면서 논산으로 가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만큼 논산은 육군훈련소가 있는 곳으로만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어쩌면 좋은 기억보다는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이 있는 곳이라 그렇게 그립고 가고 싶은 곳은 아니었나 보다.
얼마 전에 선비실천운동본부에서 주관한 문화 탐방으로 논산에 다녀왔다. 계룡시와 논산시에 있는 서원과 역사적 인물을 찾아서 떠난 탐방이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한국의 서원 중 돈암서원을 중심으로 여기저기를 탐방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물론 돈암서원도 그랬지만 사계고택과 명재고택, 종학당을 만난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여기에다가 교과서에만 보던 은진미륵을 관촉사에 들러 봤으니 정말 의미 있는 탐방이었다.
사계고택은 계룡시에 위치하면서 조선시대 예학의 대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이 말년에 살면서 학문에 전념하면서 후학을 길렀던 곳이다. 고택에 들어서니 무엇보다 약 삼천 평에 달하는 넓은 대지가 가장 눈에 띈다. 기호학파의 핵심이었던 사계 선생이 후학을 가르쳤던 것처럼 계룡시에서도 예학의 메카로서 우리 시대의 교육을 담당하겠다는 포부를 듣기도 했다. 주변이 잘 관리되어 고택을 훼손하지 않고도 많은 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시열이 쓴 <사계행장>에 사계 선생이 시골로 돌아오면서 임금에게 쓴 글이 있다.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는 실제가 어떠한지만을 보시고 거짓된 것에 현혹되지 마시고, 아랫사람을 접함에 있어서는 성심을 다하기를 힘쓰고 겉치레로 마시며, 받아들이는 일은 되도록 넓게 하시고, 채택하는 일은 되도록 정밀하게 하소서. 그리고 선입견을 고집하여 여러 사람의 의견을 막지 마시고, 일반적인 규례에 얽매어 일의 기틀을 놓치지 마소서.” 요즘 세태에 견주어도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말이었다.
명재고택은 논산시에 위치하면서 조선시대 숙종 때의 학자이면서 소론의 영수였던 명재(明齋) 윤증(尹拯) 선생이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머물면서 학문에 전념하면서 후학을 길렀던 곳이다. 문외한이 봐도 고택이 고결하고도 기품이 느껴진다. 윤순거의 시처럼 ‘세상에 시고 짜고 쓴맛이 갖추어져 있으니/ 담박함이 가장 좋은 줄 비로소 알았네.’를 연상케 하는 고택이었다. 화려하지 않으나 모든 것을 갖추어 고택의 완결성을 보여주는 듯했다.
종학당(宗學堂)은 논산시에 있는, 파평 윤씨 문중의 자녀와 내외척, 처가의 자녀들이 모여 합숙 교육을 받던 교육의 도장이다. 일반적인 서원이나 서당과는 다르게 문중에서 정한 교육목표에 따라 교육과정을 운영했으며, 학칙도 따로 정하여 시행했다고 한다. 이 종학당에서 배출된 과거급제자만 40여 명이 넘는다고 하니 무척 놀랄 일이다. 보는 이에 따라서 관점을 달리 할 수도 있겠으나 엘리트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이 모든 곳에다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한국의 서원에 등재된 돈암서원을 방문하는 것으로 논산 여행을 마무리했다. 돈암서원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 사계 김장생 선생이 돌아가시자 그 제자들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념하기 위해 1643년에 창건하였다. 김집을 비롯하여 송시열과 송준길 등 뛰어난 학자들을 배출하면서 기호학파를 대표하는 서원이 됐다. 응도당(凝道堂)의 웅장함과 특별함이 지금도 눈에 삼삼하다.
논산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결국 생각은 영주를 향했다. 논산에 비해서 영주는 가진 것이 너무나 많았다. 고택이면 고택, 서원이면 서원, 산사면 산사, 인물이면 인물 그 어떤 경우를 생각해도 영주는 풍성하기가 그지없다. 거기에다가 큰 산도 이들을 둘러싸고 있으니, 영주는 정말 복받은 동네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제 받은 복을 체로 까불 수는 없으니 하나하나 심사숙고하며 지킬 것은 지키고 만들 것은 새롭게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