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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중의 영주 톺아보기 [139] 제발 카톡으로 유튜브 좀 보내지 마세요

2024. 11. 01 by 영주시민신문

요즘 누가 뭐라고 해도 카톡이나 유튜브가 대세다. 카톡만큼 편리한 것은 없다. 몇백 명이 되는 회원들도 단톡에 묶어 놓으면 아주 쉽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사진이나 동영상 파일도 용량이 크면 적절하게 줄여서 보내주니 부담이 되지 않는다. 유튜브도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유튜브에 들어가면 없는 것이 없고 알고 싶거나 찾고 싶은 것이 있으면 쉽고 빠르게 찾을 수가 있다. 전 국민에게 가장 위력이 있는 콘텐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톡은 편리함에 비해서 불편할 때도 많다. 시도 때도 없이 날아오는 카톡에 휴대폰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물론 ‘니가 안 보면 그만이지. 왜 남 탓을 하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래도 소통을 주고받는 게 사람인데 어떻게 오는 카톡을 안 볼 수가 있겠는가. 정말이지 카톡 소리에 어떤 때는 깜짝깜짝 놀란다. 젊은 사람들처럼 진동이나 무음으로 해놓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 그게 말보다 쉽지 않다.

유튜브도 마찬가지다. 정보를 찾을 때는 한없이 유용하지만 여기저기서 난데없이 유튜브가 날아오면 여간 곤란하지 않다. 물론 보낸 것을 안 보면 그만이지만 그것도 범인에게는 쉽지 않다. 그래도 친한 친구나 가까운 친지가 보낸 것인데 영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떤 유튜버는 시시콜콜한 얘기를 얼마나 길게 하는지 짜증이 나서 결국은 듣지 않는다. 그때는 이미 유용한 것이 아니라 한 마디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카톡으로 날아오는 수없이 많은 콘텐츠는 자기 취향에 맞는 것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이야기든지, 유튜브든지, 사진이든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보내면서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니까 상대방도 좋아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편향된 생각이 들어 있는 콘텐츠를 보내는 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참으로 속이 상하다. 가끔 이런 것을 받을 때는 폭력이라는 생각까지 들 때도 있다.

요즘 들어 가장 많이 받은 콘텐츠가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내용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한 개인의 생각을 개발새발 쓴 것부터 자신의 주장을 감정적으로 여과 없이 말하는 유튜버까지 꽤 여러 번 카톡으로 받았다. 대부분이 한강의 소설을 비판하면서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4.3 사건을 왜곡했다는 내용이었다. 어떤 콘텐츠는 차마 볼 수 없이 터무니 없는 말을 늘어놓아 보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머금게 한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좌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강이라는 작가의 관점이며 세계를 해석해 내는 힘이다. 소설을 읽을 때는 세 사람이 문학 활동에 참여한다. 작가는 자신이 살았던 현실을 생각하며 인물을 창조하여 작품을 짓고 독자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토대로 소설을 읽는다. 작가도, 캐릭터도, 독자도 자유롭다. 다만 작가든, 독자든 생각을 강요할 수는 없다. 알아서 읽으면 된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읽기 거북하면 책을 덮으면 된다.

특히 자신의 편향된 생각을 글이나 유튜브로 제작하여 생각 없이 마구 퍼 나르는 것은 어떻게 보면 언어폭력에 가깝다. 그냥 편향된 생각의 사람끼리 서로 나누고 즐거워 하면서 서로 위로하면 되는 것이지 그것을 굳이 카톡으로 보내서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생각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대한민국의 온 국민이 환영하고 기뻐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소설에서 이념을 금기시하지 않는다. 이념도 자유며 작가는 독자에게 던질 뿐이다.

소설과 역사를 동일시 하는 것은 잘못이다. 자기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도 잘못이다. 모든 사람은 어떤 쪽으로든 조금은 기울 수밖에 없다. 조금 심하게 기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너무 심하게 기울어 다른 쪽의 사람을 전혀 보지 못하고 내가 옳다고만 하는 것은 위험하다. 기울되 상대방이 보일 정도까지만 기울어야 한다. 기울되 사람이 보이는 곳까지만 기울어야 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이념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센티멘탈리즘 즉 감상주의(感傷主義)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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