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합판의 대명사였던 부산의 「성창기업(盛昌企業)」이 주력이던 합판 생산을 중단했다. 성창기업은 현존하는 영남의 기업 중 가장 오래된 회사이다. 창업주 정태성(鄭泰星, 1899~1986) 회장이 1916년 영주에서 미곡상을 차린 「성창상점」이 그 뿌리라고 한다. 올해로 108년이나 되었다. 그의 조부[鄭斗元]는 부산에서 사업 실패로 대구를 거쳐 영주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 길을 거슬러 손자가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역진출하면서 사업을 성공시켜 신화를 만들었다.
기업가 정태성은 1899년 영주군 이산면 조암리에서 출생한다. 얼마 후 안정면 대평리로 이사를 했고, 여기서 6세의 나이로 서당에 나가 동몽선습(童蒙先習) 등을 익혔다. 그러던 어느 봄날 아버지[鄭錫周]가 조그만 나무 두 그루를 마당에 심었다. 정태성이 아침, 저녁으로 알뜰히 가꾸었지만 한 그루는 죽고 말았다. 이에 살아난 나무는 산비탈에서 어렵게 자란 나무이고, 죽은 나무는 평지에서 평탄하게 자란 나무라고 부친이 일러주었다. 육림의 꿈이 희미하게 형성되던 시기였다.
그는 11살 때 신교육을 위해 대구의 희원학교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평은면 사립내명학교로 전학을 했다. 그리고는 13살 때 영주향교 건물을 빌려 쓰던 영주공립보통학교(영주초)에 편입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2년짜리 대구농림학교에 진학했다. 거기서 딱 한 분 한국인 교사 정한표(鄭漢表)의 애림사상(愛林思想)이 정태성의 가슴을 깊게 파고들었다. 학교를 졸업한 청년 정태성은 아버지와 영주에서 미곡상을 차렸다. 널리 창성하라는 뜻을 담아 ‘성창상점(盛昌商店)’이라고 상호를 지었다.
1927년에는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봉화군 내성으로 이사를 했다. 당시는 영주보다 봉화가 상권이 더 컸었다고 한다. 내성리 198번지에 뿌리를 내리고 시작한 성창정미소는 사업이 나날이 발전했다. 큰 트럭도 3~4대 굴렸다. 사업이 점점 신뢰를 얻으면서 삼척 탄광에 양곡을 납품하게 되었는데, 월 납품량이 쌀 1,000여 석을 헤아릴 정도로 막대한 양이었다.
좋지 않은 도로 사정 때문에 조랑말까지 동원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회사는 무럭무럭 성장했다. 또한, 양곡 납품의 신뢰가 갱목 납품으로까지 이어지면서 ‘성창임업’도 창업되었다. 세계대전, 한국전쟁 발발로 휴업을 해야 하는 큰 아픔을 겪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가 꿈꾸던 조림사업을 부추기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한다. 어린 시절의 꿈이 현실로 다가선 것이다.
어수선한 틈새를 비집고 대구에서 「성창합판」을 세웠지만, 동란 등으로 1년 만에 폐업되었다. 피난 생활을 전전하다가 서울이 수복되자마자 부산으로 뛰어 내려갔다. 합판 원목을 수입하자니 공장의 항구 이전은 필수였다. 몇 년간의 우여곡절 끝에 1958년 8월, 마침내 미국 수출용 합판을 선적한 배가 부산항을 출항할 때는 전 종업원이 부둥켜안고 목멘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합판 수출은 해마다 증가되었다. 이어서 가구제조에까지 사업을 확장하고, 글로벌 인재 양성을 위해 성지학원, 외국어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정태성 회장은 합판사업, 육영사업을 하면서도 항상 염두에서 떠나지 않은 것은 조림사업이었다. 일찍부터 옥방임야와 거제, 김해, 울주, 양산, 동래 등지의 헐벗은 야산을 손닿는 대로 끈질기게 매입하였다. 그 결과 성창기업은 약 4,000만 평의 토지와 건물을 보유하는 국내 부동산 1위 기업으로 조사되기도 했다. 조림사업에 매진한 결과이다. 그의 회고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내 어린 시절의 꿈은 육림사업이었다. 옥방임야라 부르는 춘양목 그득한 그곳을 떠올리기만 하면 내 인생의 울창함을 느낀다. 남들은 합판사업을 주종으로 꼽지만, 나는 실로 육림의 집념이 훨씬 강했다. 세상에 나무만큼 정직한 생명체가 또 있을까? 나무의 속삭임 속에 대자연이 있고, 휴식이 있고, 생명의 신비가 있다.」
국내 기업 평균 수명은 고작 13년에 불과하단다. 성창상점-성창합판-성창기업 108년은 전국 1억㎡가 넘는 거대한 숲이 세상으로 던지는 크나큰 고함소리로 들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