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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중의 영주 톺아보기 [138] 삼봉 정도전, 뭐라도 한번 해봐야 안 될니껴

2024. 10. 24 by 영주시민신문

얼마 전에 국회에서 삼봉 정도전 학술 포럼이 있었다. ‘삼봉 정도전 선생이 꿈꾼 이상사회’라는 주제로 열린 포럼에 영주에서 올라간 40여 명을 포함하여 100석이 넘는 소회의실이 꽉 차서 보조 의자까지 놓아야 할 정도로 많은 분이 오셨다. ‘문중 사람들이 많이 와서 꽉 찼겠지.’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게 아니다. 삼봉학 관련 학자들과 삼봉 선생을 더 알고 싶어서 자발적으로 오신 분들이 훨씬 많아서 좀 놀랐다.

포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어떤 분이 말씀하셨다. “삼봉 정도전, 이제 영주도 뭐라도 한번 해봐야 안 될니껴!” 여든 전후의 연세를 지닌 분이 훅 한 마디를 던졌다. 그리고 별 말씀이 없으셨다. 돌아오는 내내 참 많은 생각을 했다. 그분이 던진 한 마디 말씀 뒤에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다. 왜 이제야 삼봉 선생을 조명하기 시작했느냐, 어떻게 영주에 기념관 하나 없느냐 하는 말이 생략됐다고 짐작했다.

창작과비평사에서 창립 70주년 기념 사업으로 한국 전통·현대 사상을 집약한 사상 선집 시리즈가 공개됐는데 정도전, 세종의 순으로 출판되었다. 물론 첫째, 둘째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사상사에서도 삼봉 선생의 민본과 위민을 실천한 사상이 현대에 와서 적극적으로 조명되고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선생이 영주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아쉬운 부분이 너무 많아서 속이 상하다.

삼봉 정도전은 조선을 설계하고 디자인했다. 조선의 국호를 정하고 국정 방향을 설정하였다. 성리학의 이념을 조선의 통치 철학으로 승화시켜 조선이 나가야 할 이념을 설정하였다. 민본사상을 주창하여 임금이 하늘이 아니라 백성이 하늘이 되는 나라를 지향했다. 임금이 나라를 통치하기보다는 재상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통치함으로 어떤 임금이 나오더라도 나라가 든든하게 서도록 국가 시스템을 만들었다.

삼봉 정도전은 한양을 디자인했다. 백악산을 중심으로 궁궐터와 종묘사직 터를 정하고 육조거리와 시장 거리를 정하였다. 한양을 성안과 성 밖으로 정하여 성안은 도성을 축조하여 4대문, 4소문을 정했으며 성 밖은 성저십리라고 하여 도성에서 십리까지를 한양으로 구획을 정하여 성안과 성 밖을 한양으로 정하였다. 한양 전체를 52방으로 구역을 정하여 이름을 정하였다. 삼봉 선생에 의해서 한양이 설계된 것이다.

여기에다가 궁궐의 이름을 정했다. 경복궁, 사정전, 근정전, 강령전, 융문루, 융무루 등등 궁궐과 궁궐의 문 이름을 정하여 성리학적 풀이를 덧붙였다. 4대문, 4소문의 이름도 정하고 4대문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리학의 덕목을 부여하였다. 여기에다가 한양 52방의 이름도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여 이름을 지었는데 그 이름이 지금도 안국동, 가회동, 광통교 등으로 내려오고 있으니, 아직도 한양에는 삼봉의 정신이 시퍼렇게 살아 있다.

혹자는 ‘삼봉이 한양을 설계했지, 영주와 무슨 상관이냐.’라고 말한다. 삼봉 선생은 영주가 고향이기도 하지만 삼각산으로 가기 전 어린 시절 상당한 시간을 영주에서 보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3년간 시묘살이를 영주에서 하면서 민본사상을 정립했다. 나주 유배를 마치고 풀려나 영주에서 3년 이상을 기거하면서 나주에서 만난 백성들을 생각하면서 삼봉의 정치철학을 다듬은 곳이 바로 영주다. 건국 직전 2차 유배를 갔을 때도 영주에서 기거하였다.

포은 정몽주를 배향한 임고서원을 가본 사람은 골짜기에 가득 찬 서원의 풍경에 놀란다. 삼봉 선생과 시를 주고받았던 원천석도 원주에서 대대적으로 숭모 사업을 펼치고 있다. 강릉 오죽헌도 예전의 오죽헌이 아니다. 오죽헌에 박물관, 기념관, 교육관을 더하여 한나절을 다녀도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다양하게 볼거리를 조성했다. 그렇다면 영주에는 삼봉 선생과 관련하여 무엇이 있는가. 시묘살이를 했던 장소에 세운 문천서당 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그 어른의 말씀이 귀를 때린다. “영주도 뭐라도 한번 해봐야 안 될니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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