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의 가을은 부석사에서 시작된다. 부석사의 단풍은 영주에서 가장 빨리 물든다. 10월 초면 좀 이르기는 하지만 좀 급한 놈은 몸의 색깔을 바꾼다. 안양루를 올라 왼쪽에 펼쳐진 단풍은 아름다워서 천상에 들어온 듯하다. 물론 부석사를 오르면서 양쪽으로 물들어가는 은행잎과 빨갛게 익어가는 사과를 함께 보는 호사도 빠질 수가 없다. 봉황산의 단풍도 부석사의 가람 배치와 어울리면 독특한 맛이 있다.
그래도 부석사의 가을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멀리 바라보는 가을산과 옥색 하늘이다. 어느 화가는 멀리 있는 사람은 눈이 없고 멀리 있는 강물은 물살이 없고 멀리 있는 산은 주름이 없다고 했다. 부석사에서 바라보는 산은 주름도 없고 경계도 없다. 산인 것도 같고 하늘 같기도 해서 땅과 하늘이 구분되지 않는다. 부석사의 가을은 우리들처럼 경계를 짓고 구분하지 않으며 차별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무섬과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은 가을이다. 무섬에 가을이 오면 늦은 여름부터 피던 꽃이 이제 막바지 채비를 한다. 구절초, 해바라기, 코스모스, 접시꽃이 가을을 맞는다. 봉숭아는 막 피어난 꽃을 지우고 씨방을 달면서 어린아이가 터트려줄 날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나지막하게 자리 잡은 가옥 사이로 가을 햇볕이 자리를 하면서 마을은 더욱 고즈넉한 적막 속에 싸인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도 무섬에 오면 이상하게도 묻히는 것 같다.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축제도 영주의 가을에서는 빼놓을 수가 없다. 가을이 되면 모든 사물은 자기의 잎과 줄기를 거두고 자신에게로 돌아간다. 고즈넉한 무섬은 봄의 생명이나 여름의 녹음보다는 가을의 조용함과 어울린다. 가을이 되면 사람들은 자기의 내면을 바라보기 시작하듯이 무섬에 가면 우리는 나를 읽기 시작한다. 외나무다리의 외로움도 가을과 어울린다. 그래서 무섬의 축제는 가을이어야 한다.
풍기인삼축제도 영주의 가을 풍경에서 빼놓을 수가 없다. 풍기의 가을은 그해만의 가을이 아니다. 6년 동안을 기다린 가을이다. 인삼은 6년근이 돼야 실하고 효능이 뛰어나다. 다섯 번의 가을이 지나가고 여섯 번째 가을에 인삼을 캔다. 6년 동안의 가을이 응축된 인삼이니 몸에 좋은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풍기의 여름이 인견이라면 풍기의 가을은 인삼이다. 인삼에는 인고의 인문학적 의미가 있다.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
그런데 요즘 인삼 가격이 좋지 않아 농민들의 표정이 울상이다. 6년을 참고 기다리는 것도 쉽지 않은데 가격마저 좋지 않아 마음이 무겁다. 이럴 때 가을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가을은 추수의 계절이고 풍성한 은혜의 계절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에 따라서는 어느 곳에도 마음을 둘 수 없어서 훅 떠나고 싶은 계절이기도 하다. 이럴 때 열리는 풍기인삼축제니만큼 많은 사람이 축제장을 찾아서 인삼도 사고 농산물도 가득 담아 왔으면 좋겠다.
누가 뭐래도 영주의 가을 풍경은 소백산이 으뜸이다. 영주를 병풍처럼 두른 소백산에 가을이 오면 온 산에 단풍이 들고 영주는 도화유수와 같은 세상이 된다. 소백산은 거대한 나비의 날개가 되어 오색 빛으로 물들어 하늘을 오른다. 사람을 살리는 소백산이 사람들 가슴이 요동치도록 만든다. 소백산의 가을은 산이 아니라 도솔봉, 비로봉과 같은 봉우리의 명칭처럼 이미 이 세상의 산이 아니다. 천상의 산이 되었다.
소백산은 어머니의 품과 같이 넉넉하고 푸근한 산이다. 사람들이 소백산에 들면 어머니 품에 들어가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날카로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소백산의 부드러움은 어머니의 가슴과도 같다. 그런 넉넉한 어머니가 봄에는 철쭉으로, 여름에는 녹음으로, 가을에는 단풍으로, 겨울에는 산 사람들이 즐겨 찾는 설산으로 사시사철 변하는 것을 보면서 범인의 눈으로는 그 뜻을 알지 못하겠다. 영주 사람들에게 가을이 스며들고 있다. 영주의 가을 풍경이 점점 깊어 가고 있다.
